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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소소시담 2. 최영미 - 사는 이유




사는 이유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이 시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로 유명한 최 영미 시인의 작품이다. 시인이 말하는 사는 이유 중 여러 가지가 내가 사는 이유와 참 비슷하다. 시, 아가, 종이, 비, 어머니. 시인과 나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이유가 다 고만고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얼마나 황홀한 삶의 이유인지 알 것이다. 신생아 적엔 눈도 못 뜬 채 짓는 배냇웃음과 꼭 쥐는 것 밖에 모르는 주먹. 백일 무렵엔 엄마를 알아보는 듯 한 눈빛. 돌 무렵엔 재잘대다 잠든 입. 순진무구한 얼굴로 자는 아이를 보면 이 아이를 볼 수 있기에 살아있음에 감격할 때가 있다. 사는 이유가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자라고 제 생각이 생기니 아이와 싸울 일이 제법 생긴다. 오늘도 동생에게 장난감을 못 빌려주겠다는 첫째와 싸우고 국수만 먹고 야채는 안 먹겠다는 둘째와도 싸웠다. 성질 같아선 회초리 들고 불 뿜는 공룡의 기세로 "엄마가 애기방 앞에서 싸우지 말랬지? 애기 깨면 엄마 재우기 힘들다고! 그건 같이 가지고 놀라고 사준 장난감이라고 했잖아!" 하고 윽박지르고 싶은데 눈 딱 감고 속으로 셋까지 센 뒤 웃는 얼굴에 다정한 목소리까지 장착하고 "우리 안방으로 가서 얘기하자. 누가 먼저 가지고 놀고 있었니?"하고 물어본다.   




아이들과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진짜 싸움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첫째가 어릴 때는 나는 나에게 늘 졌다. 아이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하지만 수 년에 걸친 그 '치열한' 싸움을 통해 나는 깎여나갔다. 엄마로서 다듬어졌다. 작가의 말대로 '비어가며 투명해졌다'.   




육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들과의 싸움이 그저 아이를 굴복시키기 위한 말다툼이나 나쁜 습관을 고칠 때까지 반복해야할 훈육일 뿐이라면 엄마의 하루는 참 허무하고 지겨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싸움은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 투명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육아는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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