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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소소시담 3. 정호승 -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정호승 



잠든 아기의 손톱을 깎으며

창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별들도 젖어서 눈송이로 내리고

아기의 손등 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나는 깎여져 나간 아기의

눈송이같이 아름다운손톱시 된다. 

아가야 창 밖에 함박눈 내리는 날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

날마다 내 작은 불행으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아야 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고요한 용기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오늘밤에는 아가야

숨은 저녁해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예수가 눈 내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 

아가야 내 모든 사랑의 마지막 앞에서

너의 자유로운 삶의 손톱을 깎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추억을 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슬퍼해 보지만

나는 지금 너의 맑은 손톱을

사랑으로 깎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처음 경험한 죽음은 첫 아이의 유산이었다. 결혼하고 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난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다. 아이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지만, 둘 다 워낙 아이를 좋아해서 기대감이 컸기에 충격 또한 엄청났다. 남편의 학업은 너무 바빴고 나는 초보주부라 할 줄 아는 요리도 별로 없어서 마침 한국에서 지인이 보내준 신라면 한 박스로 그 겨울을 났었다. 햇빛 없이 우중충한 날들이 지속되는 독일의 겨울 날씨는 꼭 내 마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한국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언니를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닌데...'로 시작되던 이메일에 이 시가 쓰여 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서 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유산이 된 건가? 그 전날 추운데 외출을 해서 그런가?’ 이유를 찾으며 자책을 거듭했던 내게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는 구절이 들어왔다. 어떻게 불행을 사랑할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이미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는 일은 그만 두기로 했다.   




2년 뒤 다시 한 번 임신했지만 또 유산이 됐고, 그 과정에서 자궁 양쪽에 큰 물혹 2개가 발견되어 한 달 간격으로 두 번의 전신마취수술을 받았다. 의사도 다시 한 번 유산이 된다면 난임전문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지금의 첫째 아이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번에는 임신 10주차 정도에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국제여행까지 했지만 나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 이 일로 이전 유산의 원인이 염려했던 대로 꼭 나 때문이 아니고 생명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린 일임을 절감했다.   




첫째를 어렵게 가졌기에 둘째를 가질 수 있을지 역시 걱정을 했었는데 이 년 뒤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고, 또 이 년 뒤 예상치 못한 셋째까지 낳으면서 아주아주 다복한 가정이 됐다. 







손톱 깎는 일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손톱 발톱도 다 잘라드렸고 결혼하고는 남편이 나의 무면허네일샵 손님이었는데 아이가 셋이다 보니 깎을 손톱이 많아서 참 좋다. 각기 다른 날 깎아주면 까먹고 때를 놓쳐서 손발톱이 너무 길어지는 일이 종종 있기에, 되도록이면 세 아이 모두 한 날에 깎아준다. 세 아이 손톱, 발톱만 깎아도 자그마치 60개라 시간이 꽤 걸리지만, 그 '맑은 손톱을 사랑으로 깎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어느덧 부쩍 커져버린 첫째의 오동통한 손등도 어여쁘고 둘째의 손톱 밑에 까맣게 껴있던 흙도 귀엽고 아직 걸어보지 못한 막내의 여린 발바닥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손톱을 깎을 때마다 첫 아이를 잃고 이 시를 읽었던 때가 떠오른다. 평생 아기의 손톱을 깎는 일은 해보지 못 할까봐 걱정했던, 많은 불면의 밤들. 그렇기에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지낸 오늘 하루가 내게는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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