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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즈 Jul 15. 2023

돌봄 돌봄 돌봄

  저출산 이슈가 나오면 돌봄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고     

  돌봄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항상 학교로 화살이 돌아간다.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젤 많이 하는 말이 "만만한 게 학교야?"     

  만만한 게 학교라기보다는 만만한 게 노동자라는 느낌이다.     

  학교를 왜 이렇게 좋아할까?      

  아이들이 학교에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생각이다.      

  아침에 바쁘게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또 학교로 보내보거나, 자기 손으로 돌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같다.

  설령 좋은 대안이 나왔더라도 결재권자가 생각하는 돌봄은 고정되어 있다고 보인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공백이 없도록 채워라.


  아이들에게 학교는 사회생활의 공간이다.     

  어린이집이 되었든 학교가 되었든 아이들은 한 곳에서 오래 있는 걸 힘들어한다. 돌봄이 종일 가능하더라도 아이를 한 곳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으라고 하는 것이 정말 옳고 가능한 일일까?

  아이를 돌봄이나 어린이집 연장반에 맡겨본 경험이 있는 보호자들은 알 것이다.     

  아이들도 그 작은 사회에서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고 쉬고 싶다.     

  오후 4~5시가 되면 승합차에 몸을 싣고 태권도로 피아노, 미술 학원으로 가는 것은 보호자의 교육열이라기보다 아이들이 학교라는 장소에 계속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작은 교실에서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여러 가지 수업을 듣고 각자 정해진 시간표대로 하교하는  반복되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사회활동의 공간. 결국 학교도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큰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했을 때 육아휴직 복직자라는 이유로 먼 곳으로 발령이 났었다. 아이가 국공립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을 때라 아침 일찍 맡길 수가 있었다. 아침 7시 반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하며 너무 다행이었고, 아이를 맡길 수 있음에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 아이 때문에 일찍 나오셔야 하는 선생님은 어떠실까? 결국 돌봄 교사도 이른 아침 또는 오후 늦은 시간의 근무에 본인 가족의 돌봄은 미뤄지게 된다. 돌봄 업무를 위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 돌봄에 관한 생각은 틀은 다음과 같다.

  1) 아이가 있는 직장인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2)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서 돌봄을 맡겨야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 양육을 담당할 사람을 부모가 아닌 타인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불편 없는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사회는 보호자에게 노동자로서 본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낸다.

  "너의 부모 됨은 축하하지만 너는 여기서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의 신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니 아이는 다른 돌봄 노동자에게 맡겨라! 참, 돌봄 노동의 가치는 원래 가정에서 늘 해왔던 일이니 그렇게 비싸게 쳐주지 못한다."                    

  안타깝다.               

  인구 절벽, 초고령화 사회 같은 단어로 위기를 말하지만 그 해결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본질을 알아야 한다.

  아이와 보호자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아이들이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그리고 누구보다 믿을 만한 돌봄을 제공할 보호자가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말로는 아이를 낳으면 애국자라고 말하지만, 아이의 부모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노동자, 근로자로 일을 하는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다. 

  비단 아이가 있는 보호자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개인의 가장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가정으로 돌아감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말이다.

  손쉽게 돌봄을 말하고, 다른 노동으로 돌봄을 채우고 결국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진정한 안정적인 돌봄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돌봄을 위한 시설을 꾸미고, 부모들에게 각종 사교육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시간표를 보여주며 공적인 교육의 장이 사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가 본디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삶.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늘 일하지 않는 사람. 적게 일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아니 부러워함을 넘어 시기하고, 질투한다. 육아휴직이나 가족 돌봄 관련 휴가를 쓰거나 육아시간을 쓰는 사람을 대놓고 싫어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개개인의 삶이 더 나아질까? 바꾸어 말하면 돌볼 사람도 없는 개인의 휴식은 어떻게 보장이 될 것인가?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는 순간 본인 자체의 존재가 아닌 직업인으로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가가 최우선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나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반려 동식물을 기르고, 봉사활동을 하고, 취미를 가지고, 타인과 교류하고 살아가는 이 모든 과정은 노동자의 신분을 가지는 순간 미뤄진다. 단순히 근무를 태만하고 다른 걸 우선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인가 뒤집혀 있다는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고 퇴근해서 다시 나로 돌아갔을 때. 나를 구성해 주는 무엇인가를 온전히 느껴야 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를 이뤄주는 삶을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니 노동으로 채워야 한다는 공식이 굳건하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또한 지금의 내가 받지 못하는 혜택에 대한 시선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내 삶의 더 나아지려면 다른 이의 삶이 나아지길 더 바라고 응원해 주고 그런 생각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바뀌고 또 점점 바뀌리라고 믿는다. 돌아보면 5년 전 10년 전보다는 나아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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