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힘이 있다. 꿈을 이루고 싶다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라고 한다. 불길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루어질까 두려워한다. 아이들에게 항상 긍정의 언어로 이야기하라 하고 그런 사람을 곁에 두라 한다.
말은 관계를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타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 존경, 관심, 거리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사회적 가면을 잘 쓰고 있는 사람이라도 주고받는 말속에 감정이 묻어 나오기도 하니까.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나 사무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 조금 다르다.
말은 때로는 진실을 숨기는 도구이기도 하다.
학교에는 수많은 구성원이 있고, 모두의 명칭과 호칭이 있다.
학교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사가 있고 선생님이라 부른다. 교육행정직 공무원은 주무관님으로 부르고, 공무직 실무사들도 대부분 해당 직종의 실무사님으로 부른다. 학교시설당직원은 당직 기사님으로 부른다. 물론 관리자급일 경우 직위나 직책에 따라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행정실장님, 부장님등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여기 학교 근무자 중 명칭과 호칭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여사님"
여사님의 사전적인 뜻은
1.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
2.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는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
두 가지 뜻 모두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학교에서 여사님을 붙여 말하는 직종은 보통 급식실 조리종사원과 청소를 담당하는 시설미화원이다. 조리종사원과 시설미화원 두 직렬의 공통점은 첫째,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둘째, 학교 근로자 중 육체노동자라는 점이다.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대부분 남성으로 생각하겠지만 현재 학교에서 발생하는 노무 관련 사항들은 대부분 시설보수 관련 업체나 용역으로 대체된 터라 실상은 다르다.
여기서 질문 하나
"직업에 귀천은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이 문장은 사실인가? 우리 사회에 직업의 귀천이 없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한가?
물론 두 문장 모두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가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우리를 돌아보자. 여사님이라는 호칭만큼 높여 대우하고 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위에서 나열한 두 문장과 "여사님"이란 단어는 모두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단편적으로 근무 공간을 살펴봐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학교는 학생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지어졌다. 학생을 위한 수업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것이 최우선의 가치임은 명백하다. 동시에 학교는 학생의 교육을 위해 모인 구성원들이 일을 하는 공간이다. 그들의 근무 환경은 어떨까? 그들의 휴게 환경은? 어느 학교나 큰 차이는 없지만 조리종사원의 경우 덥고 습한 근무 환경. 사람보다 턱없이 부족한 휴게공간으로 열악한 상황이다. 시설미화원일 경우 본인을 위한 독립된 휴게 공간이 없는 경우도 많다.
공간은 권력을 나타낸다.
80~90년대 아파트 구조를 떠올려 보자.크고 넓었던 안방과 중앙에 위치한 거실이 있었다. 자녀들 방이었던 나머지 방과 부엌의 크기는 현저히 작았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아파트 공간배치는 다양화되었다. 거실과 안방만이 베란다 채광이 들어오던 구조에서 3 베이, 4 베이 등등 다른 방들도 채광 좋은 전면으로 배치가 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공간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안방과 거실의 비율을 줄이고 더 많은 수의 방을 배치했다. 안방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방들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비등해졌다.
이는 2000년대 우리 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수평적인 가족구조로 변하게 되면서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의 권력의 차이가 줄어듬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가족 내 권력 구조 변화가 공간에도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배분이 공간의 배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교의 공간을 생각해 보자. 학생 수가 줄어드는 학교는 유휴 공간이 남아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문제는 과밀학급이다. 학생이 수업할 공간도 없는데 노동자에게 내어 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때로는 시설미화원이 교직원 휴게실을 사용하면 간혹 불편해서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잠깐 쉬러 갔는데 여사님이 있어서 눈치가 보여요."라는 이야기.
조리종사원의 경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급식실은 1층에 있어 학교 건물 중층에 있는 여직원 휴게실까지 쉬러 올라가기도 어렵거니와 샤워 공간이나 탈의 공간 등 필수 공간 확보가 쉽지 않다. 좁은 휴게 공간에 개인 사물함만으로도 가득 차 편히 쉴 공간도 가지기 어렵다. 매년 새 학년도 교실 및 특별실 배치를 해보지만 한정된 공간 속에서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학생과 교직원 사이에서 노동자의 존재는 어디쯤 있을까?
노동자가 있으나 존재는 그림자 같다. 학교의 구성원이지만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은 약하다.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 모습을 나타낸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업무는 전통적인 가사노동 중 하나라서 지루하고 매일 반복 된다. 그 성과가 누적되기도 어렵거니와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기 쉽다.
학교는 교육을 통해 서로의 다른 차이를 가르친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차별을 알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다르다와 틀리다, 차이와 차별들 비슷한 듯 확연히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우는 곳이다. 학교는 차별을 말하지 않는다. 차별은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로 스며든다. 아이들은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닌 몸으로 배운다.
우리 학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업의 존귀가 없다고 말한다고 해도 이미 학교라는 공간이 그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균형을 학교에서부터 보여줘야 한다. 게다가, 어찌 여성 육체노동자의 요구는 늘 성가시고, 귀찮고, 예민하다고 치부되는지 안타깝다. 방만한 업무태도를 보이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마저 폄하시키면 안 된다. 적어도 같은 공간에 있는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