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어갈 뿐이다
천천히 일어나서 배를 채우고 난 뒤에 '빨간 머리 앤'을 켠다. 대강 알고 있던 내용이라 뭐 또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예상보다 흥미진진하다. 시즌3까지 꽤 길어서 며칠이 더 걸릴 것 같다. 게임을 한 판만 더 하고 끄겠다는 시험 전날 마음가짐처럼 한 회만 더 보고, 조금만 더 보고 끄자는 내적 갈등이 이어진다. 겨우 타협점을 찾은 오후가 되어서야 집안일도 하고 밖에도 나간다. 남편이 퇴근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뒤엔 나란히 소파에 앉아 '나의 아저씨'를 켠다. 예상 평점이 높다면서 남편이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안 보고 싶었는데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대사에도 깊이가 있어 생각할 여지가 많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간다.
며칠 안 되는 겨울 휴가 기간을 집에서 이렇게 보내고 있다. 우습게도, 휴일이 끝나기 전에 '빨간 머리 앤'과 '나의 아저씨'를 다 볼 수 있을까 싶어 서두르게 된다. 어쩌다 휴일 일정이 이렇게 된 것일까. '빨간 머리 앤' 1화를 클릭한 것이 발단이다. 그 전엔 어떤 걸 볼까 하나씩 마우스를 올려보며 선택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전엔 아시아 작품을 주로 봤으니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별거 아닌 갈등의 과정이 내 휴가 기간의 일정을 정해버렸다.
어릴 때 좋아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인생극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걸 떠올릴 때면 '그래, 결심했어!'라는 대사가 자동으로 따라온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이 예능 프로그램을 아마도 그저 재미로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후로 주어지는 끝없는 선택의 상황에서 이 프로그램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었나 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상황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인생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는 달라서 선택하지 않은 부분의 이후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한 알 수 없는 미련 때문에, 내 선택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는 숱한 선택의 상황에서 머뭇거려야만 했다. 인생극장의 주인공처럼 주먹을 쥐고 '그래, 결심했어!'라고 자신 있게 선택한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주어진 하루에 노력은 하되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덧 내 좌우명처럼 굳어졌다. 어느 순간부터의 나는 간절함도 없고 모든 일에 비교적 무덤덤해졌다. 많은 사람들 또한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걸 보면 이러한 경향이 나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아주 가끔 조금 짠하다고 느끼지만 확실히 어린 시절보다 편해서 좋다. 마음가짐이 바뀌니 선택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다. 내 선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시간 속에서 많은 일들의 원인과 결과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다. 새삼스레 하루하루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오늘은 잠깐, 보던 영상을 멈추고 몇 년 만에 책상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뭐 대단한 결심이 있는 건 아니고 너무 더러워서 정말 심각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작은 움직임이(대대적인 작업이 되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또 어떤 사건의 발단이 될 거라 생각한다. 책장 사이에서 발견한 천 원으로 복권을 샀다가 1등에 당첨되었다거나, 아니면 2등에 당첨되었다는?(ㅎㅎㅎ)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보나 마나 이번 주엔 분리수거 쓰레기가 많아질 것이고, 대신 이사 가는 날에는 조금 더 편해질 것이다.
어제의 그 시간도, 오늘의 이 시간도 어떤 사건의 발단이 될 것이다. 오늘은 어떤 사건의 발단이 될까. 누구도 명료하게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걸어갈 뿐이다. 자신은 없지만 내심 긍정적인 결과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