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캐스터로 런던 하계올림픽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당시 체조와 리듬체조, 다이빙과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종목을 맡고 있었다.
나의 주 종목은 체조였지만, 다이빙이 의외로 다른 종목과 종목 사이 공백을 메워주는 쿠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시원한 물보라가 청량감을 선사했을 테고, 그것이 이른바 메달 가능성이 없는 비인기 종목이지만 자주 방송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이빙은 선수가 떨어지자마자 점수는 기다렸듯이 일제히 발표되고, 대기하고 있던 다음 선수가 그 뒤를 바로 이어 착지한다. 당시 해설자 없이 혼자 중계하는 입장에서는 선수들의 다양한 자세와 점수를 기술하느라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참을 정신없이 떠들다가 문득 정적이 흘렀다. 예선전으로 기억하는 남자 10m 플랫폼 경기에서 한 선수가 그만 입수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준비-공중자세-입수의 세 단계에서 첫 단추가 제 자리를 못 찾으니 선수는 그다음부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떨어질 지점을 응시하던 눈빛은 흔들리며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전방을 보고 있던 어깨가 잠시였지만 살짝 뒤쪽을 향하기도 했다. 다이빙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찰나지만 영겁 같은 시간을 흘리며 아마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한 국가의 대표선수로 발탁되기까지 오직 이 순간만을 꿈꾸며 수천, 수만 번을 반복했던 동작이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한편으로는 한 분야의 정통한 전문가도 이럴 진데, 일반인의 작은 도전은 오죽할까 싶었다. 아마 다이빙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막연해서 두려움마저 들겠구나 싶었다.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10m 높이에서 시작부터 엇박자가 나버린 그 선수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다시 뛰어내렸다. 물론 심사위원들에게는 최하의 점수를 받았다. 시간을 지체했고 자신 없는 포즈였지만, 그나마 수년간의 고된 훈련 덕분에 혼미해진 정신을 몸이 붙들어 본능적으로 대처한 게 아닌가 싶다.
올림픽 무대였기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컸겠지만 결국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반드시 뭔가를 보여줘야지’라는 과도한 긴장감,
‘그런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혹시 실수하면 어쩌지?’라는 조바심을 버리고 평소 하던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냥 몸을 날렸으면 어땠을까?
이는 체조나 피겨 등 다른 종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사위원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순간, 주저하는 선수들을 보면 해설자가 이를 놓치지 않고 일침을 가하는 경우가 있다.
“저 선수는 너무 생각이 많아요.”
몸이 치고 나가야 하는 순간, 생각에게 발목이 잡힌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방송 프로그램을 만든 프로듀서 론 마이클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배우인 티나 페이가 최종 리허설에서 자꾸 실수를 반복했지만
마이클스는 리허설을 끝내자고 했다.
페이가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요.”라고 말하자 마이클스는
“우리 쇼는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11시 30분이 되면 시작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부터 딱 1년,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샘 혼 지음, 비즈니스북스, 112쪽
리허설에서 실수가 있었더라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쇼는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시작하듯, 준비하는 과정이 성에 차지 않았더라도 실전에서는 주어진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다이빙대 위에 섰을 때는 수심 3~5m의 풀장을 내려다보며 겁먹지 말고, 내가 낙하할 한 점에만 집중하자. 어차피 완벽한 준비란 있을 수 없기에 숨 한번 크게 쉬고 어깨를 내린 뒤 본능에게 길을 내어주자. 어디 한번 마음껏 날아보라고.
넓디넓은 수영장 바닥에서 내가 정확히 목표로 하는 지점만 응시하기. 실제 선수들이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이빙대 끝에 서서 고민만 하는 아이가 되지 마라. 아래로 뛰어내려야 한다.-티나 페이,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