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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토란국

가장 그리운 음식

by 조우주


할머니, 그곳은 평안하신가요?


벌써 추석 연휴네요. 오늘따라 할머니가 무척 그립습니다. 요즘 들어 유난히 그리움이 밀려와요.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 걸까요?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가네요.


아셨겠지만, 사실 저는 할머니를 미워했어요.

어린 시절에는 아니었습니다.

가끔 명절에 뵐 때는 그저 반갑고 좋기만 했으니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시 입시를 할 당시에,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살게 되면서 그랬어요.

엄마 아빠가 모시느라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원망이 자라났나 봐요.


진 찹쌀밥이 아니면 안 드신다며 가족 모두가 억지로 그 밥을 먹던 기억.

아침마다 음식을 데워달라 하시고, 매일 기억을 잃어가시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칭얼대시던 모습.

밤마다 끄응끄응 아프다며 뒤척이실 때

온 가족이 함께 잠을 설쳤습니다.

그 모든 것이 어렸던 저에게는 버거운 짐으로 다가왔나 봐요.

당시 시험에서 계속 탈락해 독서실에서 버티던 저에게는

누군가를 돌볼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와의 기억이 그저 행복하고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죄송해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다른 친척들은 울었는데,

정작 함께 지냈던 저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명해진 것은 미움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른 기억들이 더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설거지를 하려 하면 화를 내시며 못 하게 하시던 할머니.

상장을 받아 오거나 어버이날 편지를 써드리면

“우리 손녀가 최고”라며 동네 어르신들에게 자랑하시던 할머니.

글씨를 잘 읽지 못하시면서도 제 글을 보고 싶어 한글을 배우려 하시던 할머니.

명절이면 제사를 번거롭다며 없애시고, 시장에서 사 온 전을 맛있게 드시던 할머니.


하루가 다르게 고목나무처럼 변해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서러워서 애써 외면했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모든 것에 담긴 마음은

제가 앞으로 쓰게 될 어떤 문장보다도 깊다는 것을요.

무엇보다 그리운 것은 할머니의 토란국입니다.

이제는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에요.


할머니의 토란국(AI 이미지)

그땐 그저 따뜻하고 배부른 한 끼였지만, 지금은 그 안에 담긴 정성을 알겠습니다.


혈관이 도드라진 주름진 손으로 토란을 하나하나 벗겨내던 모습.

하얗게 잘린 토란이 푹 익어 부드럽게 풀어질 때 퍼지던 향기.

뜨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던 순간, 속이 풀리듯 따뜻해지던 기억.

한 그릇을 다 비우면 “두 그릇은 먹어야지” 하시며 고봉밥을 얹어 주시던 눈빛.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허전한 이유는 단순히 음식이 비어서가 아니겠지요.


그 빈자리는 제 마음에도 생겨버린 듯합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메워지지 않고,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게 파여듭니다.


돌아보면 단 한 번도 할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지금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도요.


할머니, 제가 할머니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시던 글쓰기로 작은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제 부족한 글이 조금씩 누군가의 눈에 닿고,

마음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누구보다 먼저 오셔서 사람들에게 자랑하셨을 거예요.

읽지 못하셨던 제 글들이 이제는 조금씩 많은 분들에게 닿고 있다는 사실이, 제겐 감격이자 또 다른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시작 단계일 뿐이지만,

글을 쓸 때마다 해맑던 할머니의 눈빛을 떠올려요.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언제나 제 글의 첫 번째 독자였습니다.

비록 글씨는 읽지 못하셨지만, 제가 읽어드리면 누구보다 제 글을 사랑해 주셨지요.


내용을 다 이해하셨는지는 몰라도,

늘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주야,

누가 뭐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한다.”


하시던 그 말씀이 제 삶을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미움의 기억보다 사랑의 기억이 더 길게 남는다는 사실을.

당연해서 잊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했다는 것을.

할머니가 지켜주신 그 따뜻한 마음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겠습니다.


할머니, 그곳에서 잘 지내시지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던 토란국도,

투정 부리던 할머니의 모습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또렷하게 불러주시던 그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언젠가 할머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말할 수 있어요.


제게 남겨주신 가장 큰 선물은 토란국이 아니라,

그 사랑을 글로 길어 올릴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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