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에게는 나와 나이는 같지만 인생 3회 차 정도의 연륜이 느껴지는 그런 친구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중학생 때 그 친구가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 그 친구의 정신연령과 지금 나의 정신연령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친구이다. 오히려 더 성숙했으면 성숙했으려나. 때때로는 너무 많이 알아서 가르치는 투로 말하기에 밥맛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친구라면 이 상황을 털어놔도 조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쳤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그의 친구 중에 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했다가 함께 살아보니 너무 안 맞아 이혼을 해버린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또래답지 않은 성숙함과 이미 혼인신고를 무른 친구 이야기.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용기를 내 그 친구(이하 'J')에게 카톡을 보내게 되었다. 사실상 귀국 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먼저 한 연락이었다.
"J... 나 너무 우울해..."
J는 내가 톡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며칠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답시고 새하얀 딸기 생크림 크리스마스 케잌을 들고.
"Merry Christmas!"
현관문을 열자 작은 체구의 J가 밝은 목소리로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뭐 이런 애가 다 있냐. 나라는 애를 보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와 준 J에게 평생 갚지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그 또한 취업을 위한 시험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에 누군가를 챙겨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J는 나보다 큰 사람이었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친구에 대한 경외감과 고마움을 느낄 수는 있었다.
J는 후에 말했다. 그때 내 얼굴은 나를 십수 년 알고 지낸 이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고.
우리는 집안에 들어와 식탁에 케잌을 놓고 마주 앉았다.
J는 내가 왜 우울한 지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일단 내가 미국에 갔다가 금방 돌아온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이유로 우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물론 그것도 큰 상실감과 자존감의 하락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그를 찾았다.
어떤 주제로 그와 대화를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속 빈 강정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일정 시간 동안 그런 대화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자연스럽게 반응할래야 반응할 수가 없었다. J가 대화를 이어가려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갈 무렵 나는 입을 떼었다.
"J... 사실 나 다른 일이 더 있어."
J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였다. 솔직히 니가 그 정도의 일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며 무슨 일인 지 말해보라고 했다.
막상 입을 떼었지만 아무리 J일 지라도 그 말이 쉽게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입을 떼었다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J는 살짝 답답해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독촉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J의 눈빛 속에서 '네가 준비되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해'라는 메시지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로부터도 얼마간 뜸을 들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던 입을 열었다.
"나... 혼인신고했어."
J의 반응은 다행히도 질타보다는 안도였다. 자긴 더 큰일인 줄 알았다며 그게 뭐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는 상대방이 투기로 1억이라는 빚을 진 상황과, 이혼을 하자는 말에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이혼에 응하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J는 그제서야 '아.. 그건 니가 이럴만하다.'라고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랑은 1억 빚진 거 보다도 이혼하면 죽어버리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면 때문에 정리하는 게 맞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그 사람이랑 이혼을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조차 판단이 안 서는 상태이었다. 이혼을 하고는 싶지만 그럼 내가 이 사람과 평생을 약속했던 것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가 변할 걸 믿고 기다려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대로 정리하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람은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라는 내 오랜 믿음이 자꾸 나를 갈팡질팡하게 했다. 어차피 정리하려 해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나에게 '정리하는 것이 맞다.'라는 제3자의 말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방구석에서 끝없는 고민과 후회와 자책의 수렁 속에 빠져있던 나였다. 하지만 결코 답이 나지도 않았고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J의 지지가 한줄기 빛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 내가 이혼하려 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이게 맞는 거구나.'
J의 지지로부터 방향성을 잡은 나는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협의이혼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와 연락을 하면 할수록 나는 피폐해져 갔다. 그와 얘기를 하다보면 함께하기로 한 사람을 믿어주지 않는, 약속을 저버린, 자꾸만 이랬다 저랬다 결정을 번복하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했고 그는 알겠다고 했다. 그는 이혼하자는 말 이외에는 최대한 내 말을 따라주려고 했다. '내 목표는 000랑 싸우지 않는 것. 히히'와 비슷한 내용의 톡들을 받았다. 한 때 온 마음을 실어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그런 모습들이 착하고 짠해보여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바보처럼.
J에게 털어놓고 나니 이제 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야 했다. 나 혼자서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으니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J에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언제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는데. 얼마나 실망이 크실까. 그리고 아직 내가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신 부모님을 뒤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다 결국 말하지 못한 채 돌아서는 것을 수일간 반복했다. 이제는 정말 말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좀처럼 되지 않았다. 답답했고 죄송했고 면목이 없었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밤 중에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 지금 누나 집 앞인데 한 번만 나와줄 수 있어? 정말로 얼굴만 보고 갈게..."
'... 뭐?'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