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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아이 Sep 25. 2022

가스라이팅

나는 도저히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런 기력도 없이 방구석에 누워 숨만 쉬고 괴로워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지만 혼자 돌아서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현실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이제는 그가 빚을 진 데에 더해서 "이혼할까"라는 말까지 들은 이후였으니 더욱 이 사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가중되어 갔다. 그에게 연락이 오는 게 불편하고 겁이 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백수가 되어버린 나는 가족들이 집에 없는 낮 시간 동안 따로 할 것은 없었고 그의 연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었다. 정신을 돌릴만한 무언가를 하기에는 무기력이 극에 달해 샤워를 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자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끊임없는 후회의 굴레 속에서 '앞으로도 나는 아무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은 여생을 부모님께 의지해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고 불안에 떠는 것뿐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기회를 주기로 했지만 역시나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두 번의 이별 선언과 경솔하기 짝이 없는 코인 투자. 마냥 좋게만 보였던 그의 낙관적인 성향과 행동력이 투기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사람은 나와  맞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어찌 보면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코인 투자를 했고 나도 이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혼인신고를 했다. 비참했다. 그런 사람을 배우자 감으로 택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더 이상 내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던 중 그가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같이 지낼 때는 괜찮지 않았냐고 내려와서 일주일이라도 좋으니 같이 살아보면 좀 낫지 않겠다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입이 없었고 그 또한 대출금 상환으로 수중에 돈이 많지 않을 터였다. 그 말을 했더니 그 사람의 친구가 지내고 있는 사옥에 딸린 방 안에서 지내면 된다고 하였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혹시나 정말 같이 지내면 나아질 수도 있을까? 다시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까?'라는 생각이 들어 제안에 응했다. 응한 후에도 이게 정말 맞는 결정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에게로 가는 기차 안에서 또다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일었고 같이 사는 것이 문제 해결의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국행 결정을 되돌렸듯이 이 혼인관계도 정리를 해야만 내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내린 결정으로 몇 년 동안 빚 상환을 해야만 하는 이 상황과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과의 미래를 감당해 낼 수없었다. 빚 상환을 다 한다 할 지라도 또 언제 그런 일을 벌일지 모르고 헤어지자는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은 사람이었다. 든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고 굳건히 믿어왔던 내면의 내가 있었다. '네 신조가 그렇다면 너는 그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미칠 노릇이었다. 내면에서 모든 게 충돌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역시 결론은 일단 혼인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람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나그가 변하기를 기다려 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도착해서 나를 마중 온 그에게 바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기에 다음날 날이 밝은 후 '역시 일단 법적 혼인관계는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둘의 관계를 당장 끝내자는 것은 아니다. 지만 이혼은 하자. 내가 너무 힘들다.'라고 혼의사를 밝혔다.


그랬더니 그는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냐며 좁은 방 안에서 언성을 높이더니 면제를 사 와서 을 먹고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 자기가 했던 말을 번복하냐. 믿어주겠다던 말은 어디 갔냐' 내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법을 유튜브에 쳐보기까지에 이르렀다. 그 사람이 진짜로 나 때문에 죽어버릴까 무서웠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자리에서 본가로 올라오고 싶었지만 또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말을 들을까 무서워 일주일은 채우고 올라와야 할 것 같았다. 이혼하자는 말은 더 이상 꺼낼 수가 없었다. 같이 있어도 전혀 즐겁지 않았고 돈도 없고 에너지도 없었기에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밥을 사 먹으러 나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하는 그가 역하게 느껴졌다. 미국에 갔다 금방 포기하고 바로 온 것도, 생을 함께하자고 했다가 이렇게 식어서 이혼하자고 하는 것도, 같이 지내기 위해 내려왔다가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도, 다 내가 변덕이 심한 탓인 것으로 느껴졌다. 끔찍했다. 겨우겨우 버티듯 지내다 일주일을 채우고 본가로 올라왔다.


혼자가 된 나는 다시 하루 종일 후회와 자책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결국 이혼 얘기를 다시 꺼냈다. '그럴 거면 왜 자기와 함께 일주일이나 같이 있었냐. 자신을 속인 거냐'는 말을 들었다. 내가 내 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든 결국 나는 내가 한 말을 번복하고 그를 우롱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휴대폰을 두고 혼자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하며 연락이 안 되더라도 찾지 말라는 얘기를 남겼다. 그 와중에 그가 잘못될까 무서웠다. 그가 연락을 받을 때까지 몇 번이고 연락을 해서 그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너무나도 끝내고 싶었지만 그가 잘못되는 것이 두려워 더 이상 이혼 얘기를 꺼내기도 힘들었다. 대신 알겠으니 수시로 연락하는 것을 그만둬 달라고 부탁하였다. 카톡 수신음과 벨소리가 들리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알겠다는 대답 들었고 아침한번 저녁한번 정도로 연락 빈도가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이걸로 내 내면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리 만무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순전히 미국에 갔다 바로 돌아 무직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그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셨다. 내 지인과 가족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즉 누구와도 의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님께는 물론이요 친구들에게조차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후회와 자책으로 점철되어있는 황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털어놓음으로 인해 들려올 비난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설사 말을 꺼내더라도 내 선에서 어느 정도 해결한 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스스로 해결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라면 그렇게 이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죽을 용기 또한 없었다. 그저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백번 이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내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이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할만한 한 사람이 내 머릿속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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