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15
평생 닮아가고 싶은 한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이 평생 나를 닮아가기를 간절히 바랬었으리라. 나는 왜 그랬을까? 우리 둘은 결국엔 서로를 닮아가게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걸까? 그 사람의 마음을 내 곁에 평생 붙잡아 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로부터 17년이 지났고, 다행히도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닮아가는 중에 있다.
우리 가족은 주말 아침이면 구덕산(부산 서구) 꽃마을에 간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제법 굽이진 흙길까지 지나고 나면, 어림 잡아 수 십 가구 정도가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 첫머리 지점에 있는 자그마한 스튜디오에 다다르면 아내와 아들은 '꿈꼬마 예술단'으로 변신한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만 참여가 가능하기에, 같은 시간 나는 바로 옆 구덕산 편백길을 거닐며 혼자만의 행복을 만끽하곤 한다. 한 손에는 2천 원짜리 꽃마을 표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하지만 오늘은 다른 한 손에 <나랑 닮은 사람에게 주고 싶은 책> 한 권을 몰래 더 숨겨 들고 나왔다. 제법 비장한 각오와 함께. 지금 이 순간은 내가 그토록 닮고 싶어 했고 나를 닮게 만들고 싶었던 아내를 위해 17년 전 대학생 시절의 '나'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으려나? 사실 좀 의문스러웠다. 오래전에 품었던 심정을 애써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닮아왔는지를 책을 통해 조용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편백숲 명상의 길'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찾게 된 아내의 책장
잃어버린 책 찾기 프로젝트에서 소개하고 싶은 귀한 책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책을 알리는 프로젝트가 아닌가? 내 기준은 우선 내 기억에서도 잃어버린 책을 찾자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으려나? 아! 아내의 책장!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책(서류)들이 가끔씩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했던 게 기억났다. 막상 아내의 책장 앞에 서니 미안한 마음이 엄습해오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내가 읽을 책을 사서 나르기만 바빴지, 그동안 아내의 책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게 내심 미안해졌다. 아무래도 내 돈(?) 들여 산 책들이 아니다 보니 제목들이 제법 신선해 보이는 게 잘됐구나! 하며 한 번 골라볼 태세를 취하고 있는데, 어라??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책 한 권이 보이네? 내용은 그다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왜 저 책이 눈에 밟힐까?? 하는 의문과 함께 아내의 책장 한 편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낡은 책 한 권을 손에 집어 들었다.(이 글을 아내가 보면 큰일 날지도...)
이 책은... 내 돈 들여 산 책이었다!
책 내용이 뭐였더라? 하는 호기심에 첫 장을 넘기는데, 뭐가 거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엥?! 이게 얼마만이야 도대체!! 책은 일단 뒷 전으로 두고 떨어진 '그것' 챙기기에 바빴다. 그것은 대학생 시절 우리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와의 안동 여행사진, 동아리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얼굴이 발그레한 사진,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던 아내의 사진 하며 20대 초반의 풋풋한 우리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여담이지만 이때 나는 디지털카메라가 없던 관계로 안동 여행의 추억을 제대로 남겨오고자(?) 여분의 필름통을 서 너개 준비했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그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내의 책장에서 보물을 발견했구나. 여태껏 이 사진들이 여기에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네! 2003년 초의 추억들이 생생하게 소환되는 게 아닌가. 거기에는 사진 말고도 납작하게 마른 나뭇잎 조각들이 책갈피가 되어 굳은 채로 함께 있었다. 책 속에 소중한 무엇인가를 숨겨(?) 두길 좋아하는 아내의 작품이 분명하리라!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의 첫 장을 넘겼다. 헉!!! 이게 뭐야 도대체??? 아까의 충격보다 더 큰 충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책은 내 돈 들여 산 책이었다!!!!
뒤통수를 한대 후려 맞은 듯한 느낌으로 갑자기 끊겼던 필름이 탁! 하고 되살아나더니, 2003년 3월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하고 100일째 되던 날이 3월 7일이었고 그날 우리는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1주일 이후가 둘이서 맞이하는 '첫' 화이트데이였던 것이었다! 나는 흔해빠진 사탕 묶음을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3월 13일까지도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고민만 했었고, 제대로 된 선물을 사지 못한 채 화이트데이를 맞이했다. '큰일 났네, 뭘 사야 하지?'. 우리는 캠퍼스 커플이었기 때문에 항상 데이트 장소는 학교 주변이었다. 그날은 아내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먼저 학교 앞에 도착해서 선물을 사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아내가 감동할 폼나는 선물과 꽃다발 그리고 마음을 담은 러브레터까지. 그 어떤 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 너무나 초조해졌다.
수중에 큰돈도 없고, 막막해졌다. 그래 서점에 가보자!!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은 바로 책이다!! 약속시간 전에 나는 여대생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 사랑이야기를 찾아내어야 할 미션이 생겼다. 급한 마음에 학교 앞에 자주 가던 서점에 들러서 사랑이야기와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집어 들고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했던 수필이나 소설에 '사랑'이라는 범주는 흔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사실 사랑을 잘 몰랐다.) 이 날만큼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내가 골라든 책이 바로 잃어버린 책의 주인공, <나랑 닮은 사람에게 주고 싶은 책>이었다. 꽃다발을 고를 시간도 필요했기에, 얼른 결제를 하고 서점 입구 한 편에 서서 내 마음을 글로 담았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이 급해서 개발새발 흘려 쓴 글씨와 차마 두 번은 읽지 못할 편지 내용을 다시 보니, 아내가 이걸 읽고 나와의 헤어짐을 선택했어도 됐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화이트데이를 맞이한 우리가 '연인'이 된 지는 10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아내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아내는 나의 첫사랑이 맞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우리의 인연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동문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재수 시절의 세계관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대학생이 된 아내는 내가 모르는 세계를 간접 체험시켜주며 지치지 않도록 힘이 되어 주었다. 뭐, 2002년 여름날 월드컵의 함성을 독서실에 있는 나에게 전달하며 속에 천불을 만들어주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동갑이나, 아내는 02학번(산소 학번)으로 03학번(오존 학번)인 나보다는 1년 선배가 된다. 1년이 늦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입영 통지서를 받았고, 1학기가 끝나는 7월이면 입대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 군대 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들이 흔하다고 하는데, 아내가 떠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아내가 나랑 닮은 사람이 된다면 나처럼 아내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위안 삼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화이트데이날 저 책을 고르게 된 이유다.
3분 안에 반하고, 30년 동안 사랑하기
우리가 사랑에 빠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까요? 최소한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3분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자는 약 30초의 판단을 거친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여자는 3분여 동안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야 조심스레 결정을 내린다고 하는군요. 어쨌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채 3분이 넘지 않는 셈입니다
...(중략)...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세 시간, 석 달, 삼 년이 흐르도록 우리는 단 3분 만에 벌어진 사랑을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의 길을 떠나려고 결심하는 것은 누구든지 금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 여행의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 이 책 속에서 여대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 것 같은 이야기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이제는 대학생으로 빙의되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하지만 책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책은 그대로인데 읽는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책이 나에게 물었다.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너는 아내와 얼마나 닮아있느냐고. 나는 조금은 초점을 흐리고 말했다. 항상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책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내와는 얼마나 닮아있느냐고!? 재촉하던 질문에 나는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고민스러웠다. 내가 다한 최선은 아내를 위한 최선이었다고!! 그러나 책은 나를 질책하기보다는 삶을 돌아보라고 말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금슬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들의 산행이 많이 보인다. 나도 곧 중년인데, 이제는 중년을 준비해야 할 때이려나? 가끔씩 젊은 연인들도 편백숲 길을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길을 지나가는 연인들의 나이는 점점 더 보이지가 않는다. 책을 읽다 말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게 된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분명 그분들은 서로 닮아있었다. 흥겨운 노랫소리를 함께 흥얼거리기도 하였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좁은 편백길을 걸었다.
이제는 아내와 함께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함께 곱씹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서로 닮아갈 수 있는 세월이 더 남아 있다. 기회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안도감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던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30년은 함께 하고픈 연인이 있는 분들이 읽기 좋은 책 : ★★★★
아직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분들이 읽기 좋은 책 : ★★★★★
연인을 만날 준비를 하는 분들이 읽기 좋은 책 : ★★★
나는 연애가 뭔지 모르겠다!! 하는 분들이 미리 읽기 좋은 책 :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들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저 혼자 쓰는 글이 아닙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