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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08. 2024

이별이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다

32. 예상하고도 남았다

회사에 있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화 가능하냐고 먼저 톡이 왔는데, 이런 경우 보통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약간 긴장하며 받았는데 남편은 요양병원에 전화를 해봐 달라고 했다. 시어머님이 응급실로 가며 퇴원했던 요양병원에 다시 입원하려는데, 병원에서 어떤 양식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시어머니의 상태로 보아 간단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큰일에 나서는 사람처럼 마음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긴 호흡을 하고, 요양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하는 일이었기에 미리 질문을 적어두고 놓치는 내용이 없도록 하나씩 물었다. 요양병원은 입원하자마자 시어머니가 종합병원으로 이송되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주치의가 그냥 환자를 받기에는 부담스러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DNR이라고 하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위급 상황마다 종합병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요양병원에서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치료한다고 한다. 의료행위가 아예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종합병원처럼 방대한 치료를 포기한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부터 새벽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잠이 깼다. 돌아가신 아빠가 그리워 미치겠다가, 시어머니가 안타까워 새벽이 참 힘들다. 시아버지 챙기러 시댁에 가서 어머니의 물품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가 잘 드시던 음식을 먹을 때도 맘이 아프다. 어머니가 해주던 걱정스러운 말이 떠오를 때도 슬프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시댁 식구 중 유일하게 힘든 점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시어머니였다. 어머니도 내게 당신의 힘든 일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뭘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그래서 그 어려움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사이였다.

한때 친자식만 생각하다가 내게 상처를 준 시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딸을 잘못 키웠다며 사과를 하셨다. 난 어머니가 그렇게 쿨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든 세대가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 있지만 나름대로 멋지고 합리적인 분. 내가 보았던 시댁은 어머니 덕분에 모두 편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한 사람이었지만 몇 사람의 몫을 해서 가족을 돌봤다. 지나고 보니 나도 그런 어머니가 든든했던 거 같다.


어머니는 어느 시점부터는 내게 당신을 가리킬 때 ‘엄마’라고 하셨다.

‘엄마가 그건 해줄 거니까 걱정 마라’고 하셨다.

몇 년 전, 시아버지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입원하셨을 때 우리 부부와 어머니, 셋이 함께 밤을 새우며 지켰다. 그때 어머니는 시아버지보다 훨씬 건강해서 모든 일을 먼저 나서 조율했다. 그 후, 시아버지가 넘어져 고관절이 골절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자신이 간병비를 내겠다 나섰고, 아빠를 떠나보내고 칩거하다시피 있는 나에게 굳이 전화를 해서 함께 울어주셨다. 그리고 어떤 날은 시아버지의 짜증에 너무 힘들다고 내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와의 일은 기억나는 것이 참 많다.


시어머니도 언젠가 떠나실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예상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연명의료에 매달리는 남편과 형제들이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고통스러울 어머니 입장을 제발 생각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라서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도 지금까지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요양병원의 연명치료 거부서에 사인하라는 말이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어머니가 고통스럽기만 한 거보다 편히 떠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장이 무너진다. 한치 걸러 두치라고 우리의 한치는 참 멀고도 가까운 것이었나 보다.


‘어머니가 없는 시댁은 가고 싶지 않은데,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더 떠오를 것 같아 두려운데 어쩌나. ‘


그래도 혹여 어떤 일이 생긴다면 이젠 잘 보내드려야 한다. 온몸에 갖은 관을 꼽고, 욕창에 시달리는 적막의 시간을 계속 견딜 수는 없다. 신을 믿고 따르는 어머니가 평안하시기를 바란다. 우리 아빠에 이어 다시 엄청난 이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빠를 떠나보내며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나의 형제들이었다. 그래서 남편이나 시댁 형제들에게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고 말해주었다.

그건 돌아가실지 모르는 부모에 대한 걱정과 잘 보내드리기 위한 마음을 나누라는 의미였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잘 보내드릴 것인지 등이 정리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대도 슬픔이 가실 수 없지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분을 제일 잘 알고, 그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자식들이 어울려 그분의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며칠 후 , 누나의 전화를 받고 남편은 돌처럼 굳었다. 시누이가 어머니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고, 자기만 울다 전화를 끊은 모양이다. 남편은 자기 슬픔은 어쩌지 못하고, 누나의 슬픔만 더 얹어 받아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돌처럼 굳게 만든 그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다.


“엄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신대.”

“당연히 그러시겠지.”

“아이처럼 구시나 봐. 계속 집에 가겠다고 하고, 배가 고프다고 피자가 먹고 싶다고.”


나는 더는 맞장구치듯이 말을 받을 수 없었다.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남편은 일어나 요란하게 청소기를 돌렸다. 나는 그 소리를 피해, 어쩌면 남편을 피해 베란다 벤치에 앉아서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울음을 울었다. 아빠를 떠나보내야 할 때도 나의 울음을 드러내는 것은 꺼려졌다. 하지만 어찌어찌 참아내지 못할 때는 몇 번 터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머니 때는 더 눈물을 숨겼다. 나의 슬픔이 남편의 슬픔을 크게 만들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나보다 슬플 사람이니까, 나보다 아플 사람이니까.


눈물을 닦고, 나는 이때 뭘 할 수 있나 생각해 봤다. 집에 돌아오실 수 있을까? 그건 어머니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빠 때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다스릴 약이, 주사가 집에는 없다. 어머니의 숨 가쁨과 힘듬은 병원에서 다스려줘야 한다.

그럼 피자는 어떻게 먹을 수 없을까? 목관을 하고도 음식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기도를 확보하여 둔 것이니 음식을 삼키는 길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그건 그저 상황인 거고, 음식을 삼키다 찌꺼기라도 기도 쪽에 흘러 염증을 일으킨다면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음식을 먹는 건 어렵다고.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입에서 맛만 느끼고 뱉으면 어떤가? 평소에도 햄버거나 피자를 좋아했던 분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 그런데 참 상상만으로도 너무 괴롭다. 안타까워 미치겠다. 이렇게 방법이 없다니...


바깥바람이 고프고, 배가 고프고, 사람과의 소통이 고플 때가 있다. 시댁 식구들은 정신이 명료한 것에 한껏 의미를 두었지만, 명료하여 그것들이 고스란히 고파 오면 어쩌나.

나는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앙이 깊은 어머니였으니 하나님 품에서 행복하게 해달라고, 몸에 붙은 관을 모두 빼고 하나님 곁에서 걷고, 먹고,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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