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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01. 2024

방향이 틀린 달리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30.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없으니

사람이 죽음 직전에 쓰는 의료비는 평소 쓰던 의료비의 몇 배에 이른다. 통계에 따르면 죽기 5년 전 의료비가 평생 쓰는 의료비의 절반이고, 어떤 자료에서는 죽기 3년 전에 전체 의료비의 80퍼센트 정도를 쓴다고도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가며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중환자실에 가는 환자 중에는 실제 치료가 중한 경우도 있지만 죽음에 이르기 전 연명의료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의사가 연명 관련 행위를 치료가 아니라 의료라고 말한다. 치료라는 말 속에 병을 고친다는 의미가 담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연명에는 고친다는 의미가 담기지 않는 것이다.


중환자실은 의학이 발달할수록 몸에 다는 기기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병이 나아 생존하는 확률은 그리 늘지 않았단다. 그건 그저 중환자실이 죽음에 이르기 전 통과의례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한 달이면 천만 원에 이르는 병원비는 둘째 치고, 수많은 기계에 몸을 맡긴 환자는 과연 괜찮은 걸까?

중환자실에는 온몸에 관이며 선이 달려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다. 그런 상태로는 견디기 어려워 대부분 잠을 재우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떠나게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난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얼마 전 간병인의 문자는 절망적이었다. 기관 절개 후에도 시어머니는 호흡기 떼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짧은 시간은 잘 지나갔지만 긴 시간이 지나니 너무 힘들어하셨다는 거다.

점점 가래도 심해지고, 얼마나 힘드신지 수면제를 찾으셨다고 한다.

간병인의 문자를 받고, 나는 산책길에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시부모님의 일에는 내 의견을 최대한 자제하는데 이건 예전부터 부탁하고 싶었다.

“어머니 나중에라도 심폐소생술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자. 그때 의사가 물었을 때 그것까지 모두 해달라고 했었잖아.”

“지금 그런 상황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해.”

남편은 당장 어머니가 돌아가실 상황은 아니라며 내 말을 막았다. 나도 그건 안다. 당장은 아니다. 종합병원에 계신 이상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처음 응급실로 갔을 때부터 그럴 일은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목으로 넣어 숨을 불어넣었고, 수혈을 했고, 혈압상승제를 주었기 때문이다. 병원은 그런 걸 다 해준다. 게다가 의사의 질문에 심폐소생술까지 모두 하겠다고 한 터였다.

난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하지 않았으면 했다. 심폐소생술은 강한 압박을 가해 심장을 뛰도록 하는 건데, 그러다가 갈비뼈가 부서지는 일이 흔하다고 하고, 또 무척 아프다고 한다. 뼈가 부러진다니 아픈 거야 따로 말해 무엇할까. 잠시의 아픔을 참고 소생한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

지금 어머니는 혼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남편은 여전히 호흡기가 크냐 작냐를 두고 궁금해했다. 이렇게 아파서 고생을 하는데 크든 작든 무슨 소용일까. 지금까지도 너무너무 힘든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을 겪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현실을 너무 외면하는 거 아닐까.


가족 톡방에 시누이는 ‘기도만이 답’이라고 했다. 그래, 기도는 답이 맞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하지만 모두 기도만 하고 다른 건 안 한다면 그건 광신도나 하는 짓 아닐까. 난 어머니를 돌볼 방법을 고민해봤으면 한다. 어머니를 일인실로 모시고, 가족이 자주 들여다보는 걸 해보면 어떨까? 혹은 당장 집으로 오실 수 없는 상태니 병원에 계신 동안이라도 가족이 돌보면 어떨까?

지난달, 응급실에 간 후 가족이 어머니를 본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그 긴 고통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온 거다. 이게 치료가 맞는 걸까. 정말 치료를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냉정하게 의사에게 묻고, 답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시동생이 어머니에게 필요하다는 물건을 병원에 전달하러 갔단다. 간 김에 영상통화까지 하고 나섰다며 자랑스레 가족 톡방에 올렸다. 그렇게 엄마를 돕고, 위로했다는 마음이 들었던 거 같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시누이는 시동생에게 영상통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문자를 했다. 간병인에게 연락이 왔는데 통화 이후 시어머니가 두어 시간을 우셨다고.

간병인 말로는 겁이 날 정도로 울었다고.


겁이 날 정도로 우는 건 어떤 걸까?

어머니는 이리저리 애쓰는 자식이 한없이 안타깝고

자신의 힘든 처지가 괴로웠는지 모른다.

소리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쳐 날뛰며 소리쳐 울고 싶었을 텐데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에서

울음도 울음답게 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답답함과 괴로움이 떠오르면 나도 미칠 노릇이 된다.

이 상황은 그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는

매 순간이 미칠 노릇이다.

회복의 희망을 품고,

그래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미래를 꿈꾸지 않고는

이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의 저자 강연을 들었다.

홍영아 작가는 '병원 24시' 작가로 죽음에 이른 많은 사람과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썼고, 그 이야기를 강연으로 들려주었다.

강연을 듣고 있자니 우리 상황에 해당하는 내용도 나왔다.

의사는 아무래도 전문가라 환자의 진행 상황을 우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또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으니 환자와 환자 가족은 그 기적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런 것을 상상하며 늙음과 병듬도 고치려드는 것일 테다.

작가는 자신이 방송에서 그런 부분을 부채질한 것이 아닌지 반성한다고 했다. 강연의 시작은 그런 자기반성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죽음을 통해 잘 살고, 잘 죽는 방법을 미리 고민하자고 했다. 그래야 자신과 가족의 죽음에 제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수많은 죽음을 인터뷰한 작가는 간병에 대해 f=ma라고 말했다.

너무나 이상적인 죽음을 준비했던 남매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떻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리 잘 돌볼 수 있었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기간이 무척이나 짧았다고

그래서 그렇게 정성을 기울일 수 있었다고 대답했단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 말은 그 f=ma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이 충분했다면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가 될 것이다.

돈이 많은 이들은 간병을 모두 돈으로 해결해서 자신의 노력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래서 길게 길게 연명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한 생각이며, 방법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 모든 사람과 같지는 않겠지만

내가 원하는 삶과 죽음을 떠올릴 때 그건 생각의 방향이 반대에 있다고 본다.

돌본다는 건 자신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받는 상대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히 도울 수 있는 거다.

방향이 틀린 달리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달려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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