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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Apr 24. 2024

연명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일상

28. 좋은 죽음을 계획해야 한다

시어머니의 절개시술은 무사히 끝이 났다.

중환자실에서 며칠 상태를 보고 일반 병실로 옮긴다고 한다.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응급실에 가고, 기관삽관을 하고 빼는 과정을 거쳐 결국 기관절개술에 이르렀다.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어머니는 이렇게 숨을 쉬며 지내야 할 것이다.

입으로는 음식을 먹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남편은 차츰 회복하여 어머니가 절개한 기관을 봉합하기를 기대하는데, 의사는 호흡이 어려운 원인을 노화라고만 설명한다. 병명이 있다면 고치면 될 텐데 노화는 불로초가 있지 않는 한 어쩔 수가 없다.

기대와 현실이 달라서 참 어렵다.      


남편은 운동을 해서 걷고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거라는 남편의 방식이 이번에도 통하면 좋겠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힘든 마음에 책만 읽고 있다.

 며칠 전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읽었다.

그저 명이 다해 죽는 건 줄 알지만, 의학이 발달한 요즘은 그게 다가 아니다. 수많은 수술이 있고, 시술이 있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고 또 살려낸다.

아픔을 치료하고, 목숨을 살리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고통스런 연명에 이르게 하는 의료가 과연 축복인지 묻는다면 뭐라 답을 하기 힘들다. 그 상황에 본인이 서 있지 않다면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어설픈 대답은 오만과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있다.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눈앞의 현실이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의 생존이 이어지는 것.

일상은 아주 평범한 것이고, 소소한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잔잔한 것이다.

연명으론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연명을 일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책에서는 일상을 누리며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는 연어처럼 사람도 집에 대한 갈망이 있다. 집처럼 편한 곳이 없는 거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노인 대부분의 소원은 집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죽는 것이다.      


옛날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죽는 일이 가능했다.

노쇠한 노인은 가족의 도움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모두 독립된 생활을 하니 노쇠한 부모를 모시겠다고 뒤늦게 함께 사는 일은 흔치 않다. 그건 친자식이건 며느리, 사위건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온 가족이 아픈 할머니를 돌봤고, 결국 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정말 정말 쉽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것을 견뎌내는 가족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겪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온 가족이 돌봤다.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노인을 돌보는데도 온 가족의 힘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이니 모두 내놓아야 할까?

가족이라면 그게 당연할 거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현실은 다르다.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겐 저마다 사정이 있고,

그런 까닭에 사랑하는 부모지만 온전히 돌보기 힘들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누군가가 희생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노인 문제는 언제나 희생을 동반해야 온전해진다.      

부모님이 노쇠해지는 지금.

자식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희생을 한다지만 자식의 고통은 아픈 부모가 겪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쯤에서 우리는 다른 손을 빌리게 된다.

요양사, 간병인, 요양병원, 요양시설 등등.    

   

사실 난 작은 고민을 하나 하고 있다.

시어머니가 일반병실로 오면 간병인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중환자실에서 혼자 견뎌온 어머니에게 다시 간병인만 붙이는 것은 잔인한 느낌이다.

솔직히 시누이가 나서서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시누이를 도와 며칠씩 나눠하고 싶다. 그러고 나서 요양병원으로 가면 어떨까 싶다.

그런데 이게 맞다는 확신은 없다.

어차피 계속 돌볼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당연한 듯 간병사와 요양병원에 맡기는 것이 나을지도 말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고민에 맘이 복잡하다.    


간병은 실행하는 어려움뿐 아니라

실행하지 못하고 모른 척 살아야 할 때에도 몹시 힘들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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