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은 고정값이 아닌 변수다
이 회사는 채용 사이트에 올라온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연혁이 오래되었고 매출 규모도 적지 않았다. 100명 남짓한 중소기업이었지만, 커다란 사이클을 지나 시장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린 조직 같았다. 서류 제출 후 2주 정도 지나서 합격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관은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 팀장이었다. 내가 제출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면접관은 회사에 대한 소개를 놀랄 만큼 자세하게 해 주었다. 주요 연혁, 사업 구조, 클라이언트의 특성 등등. 얼마나 많은 면접자에게 말했는지 몰라도 막힘없이 귀에 술술 들어오는 설명이었다. 회사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나서야 면접관은 나의 공백기와 경력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건넸다. 일반적인 질문들이었고 흘러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팀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새로 합류하게 될 기획자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등 궁금한 점을 편안하게 물어보았다. 면접관은 기존의 솔루션에 AI를 활용한 기능을 도입하려는 중인데 내가 기획 파트의 역할을 담당해주면 좋겠다고했다.
면접이 마무리될 즈음, 면접관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회사 소개를 할 때처럼 회사의 매출 구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A4용지 위에 볼펜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다른 회사에 비해 연봉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안정적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큰 변동 없이 매출이 꾸준하고, 제 발로 나가겠다 하지 않는 이상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라고 했다. 많은 직원들이 연봉 때문에 퇴사하는 경우가 많아 고민이라고 하면서 나에게는 희망 연봉이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나는 보통 면접장에서 희망 연봉을 물어보면 예전에 받던 연봉에서 5~8% 정도를 더해서 불렀는데,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이전 연봉과 동일하게 부를 때도 있었다. 그날도 비슷하게 대답했다. 면접관은 난색을 표하긴 했지만 납득한 듯했다. 대표와 통화를 하고 오겠다면서 면접관은 회의실을 나갔다가 몇 분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약간 민망한 기색을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요, AI 분야는 아직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신입이라는 입장이세요.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면접관은 신입 사원 수준의 연봉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상한 근거였다. 누군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야? IT회사 대표 맞아?’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전달 과정에서 빠진 내용이 있었는지 몰라도 나 또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미 AI기술이 수많은 사업 분야에 도입되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 중이고 안타깝게도 그 때문에 사람이 일할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레퍼런스가 없다니? 하지만 모든 상황을 언제나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원래 회사라는 곳은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억지를 부릴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각자의 입장이 있는 것이니 내 기준에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고 또 다른 기회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정중하게 뜻을 전달하고 마무리하려는데,
“잠깐만요.”
면접관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현재 다른 팀에 기획자 공석이 하나 더 있는데, 그쪽 포지션이라면 나의 조건에 맞춰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제안이었다.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황당한 감정이 몰려왔다. 만일 내가 조금 전 낮은 연봉의 조건을 수락했더라면? 회사 측에서 제시한 조건이 애초에 터무니없었기에 망정이지 나의 희망 연봉에서 애매하게 낮은 수준이었다면 한 번쯤 고민하지 않았을까?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면접관의 새로운 제안을 듣기 시작했다. 연봉이란 때로 어이없을 만큼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날 다시 한번 느꼈다.
기업은 구직자의 조급함과 시장의 불안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을 먼저 제시하기 마련이다. 이때 나만의 명확한 기준선이 없다면 당황하거나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본인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겠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든 이유는 회사의 주장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새삼 깨닫는다.
이 날은 면접이 끝나고 가까운 카페에서 당 수치가 크게 오를만큼 달달한 케이크를 먹었다. 개운치 않은 면접이었지만 살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오늘처럼 나에게 유리한 패를 얻는 데 성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털어버리기로 했다. 이후 나와 이 회사와의 인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사실 이 회사와는 아직 남은 이야기가 더 있다. 새로운 제안을 받은 이후에 어떤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또 무엇을 겪고 어떤 결정을 해야 했는지 추후 이어질 글에서 언젠가 풀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