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공주는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결말을 믿는 어른은 없다. 결혼이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며,오래오래라는 단어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20세 시대. 듣기만 해도 징글징글한 이 긴 세월을 함께 할 반려자 고르기란, 서른~마흔 남짓한 인생 풋내기들에게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도 할 사람은 해야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오늘은 30대 중후반 ~ 40대 중반까지 마삼오 대원들에게 들려주고싶은 결혼 동화를 구연해볼까 한다.
하나. 왕자는 없다.
동화의 성립조건은 멋진 왕자, 맘씨와 얼굴이 예쁜 여인, 신분상승이다. 왕자의 재력과 지위를 가지며 외모까지 수려하기란 어렵다. 간혹 TV프로그램에 일반인을 자처하는 잘생긴 의사들이 나오지만, 동네 병원 진료실에서 조차 못 본 희귀종이 내 연인 후보자로 나올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서른을 넘기면서 결정해야 하는 건, 나와의 빠른 타협을 통한 선택과 집중이다. 외모, 재력, 능력, 생활력, 성격 등 다양한 요소 중 단 한 두 개만 수려해도 그를 왕자로 받아들이기.
연애박사김지윤 소장님이 말씀 중 새겨들을 말이 있어 옮겨본다. 너무 멋진 영혼의 왕자님들이 안타까운 개구리 껍질 안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고. 껍질 안의 왕자를 알아보라. 예비 공주의 첫 번째 미션이다.
둘. 공주도 없다.
여주인공은 외로워도 가난해도 밝고 꿋꿋하게 헤쳐나간다. 하지만 그녀들이 왕자를 만난 건 착해서가 아니다. 예뻐서. 누더기를 걸쳐도 빛이 날 정도의 외모여야 외모만으로 공주로의 신분상승이 가능하다. 이런!내 껍질 안에 갇힌 맑은 영혼은 누가 알아봐 주지?
방구석에서 밤날 팩 올려봤자 소용없다. 더 다양한 매력 연마 필요. 예비 왕자의 정신을 잠시 놓게 할 술과 언변과 다른 매력은 어떤 게 있을지. 개인 무기고 재정비하기.
무기 중 반드시 빼먹지 말아야 할 건 체력이다. 신데렐라도 무도회 가서 놀다가 구두를 놓고 왔고, 백설공주도 어디 쏘 다니다가 사과 먹고 잠든 김에 왕자를 만났다. 공주의 외모는 아닐지언정, 나가자. 그게 어디든.
셋. 어떤 신분상승을 원하는가?
집은 있나? 뭐 하는 사람임?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이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것인가? 아이낳고 소소하게 사는 게 정말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인가? 서울 한 복판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네에 자가로 얹혀 살면 그것이현대판 신분상승일까?
일 잘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결국 집에 쭉 있게 된 친구나 주변 지인을 보면 하나같이 현재의 삶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아이는 예쁘지만 내가 없는 것 같아. 편하지만 뭔가 하고 싶다. 돌이킬 수 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야.
주변의 데이터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이+가정을 이룬 케이스보다 본인 커리어를 쌓은 쪽에서 본인인생면에선더 높은 점수를 준다. 왜일까?
이유는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능력은 곧 나에 대한 가치 증명이다. 경력단절은 더 이상 나를 사회적으로 증명할 수단이 없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오래 살면 인정된다는 내조의 경제적 가치를 누가 평시에 알아줄까?
하루아침에 남자의 변심으로 모든 걸 잃은 여주인공, 그리고 그녀의 복수. 아침드라마 단골 소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공포를 단서로 한다.지금 사는 이 집이 내가 번 돈으로 구성된 내가 이룬 성과가 아니라면, 하루아침에 물거품 될 수 있는 상태인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선 현실이다.
가족이 번 돈은 그것이 부모님이든 남편이든 그게 누구라도 내 것이 아니다. 돈을 통한 신분상승을 원한다면 요행을 바라지 말고 직접 벌자.설령 운 좋게남에 의한 동화적 신분상승을 할지언정,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분상승은 살고 있는 집값과는 무관하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청소기의 빈도와 쓰레기의 양에 비례한다.인격체로존중받고 서로 사랑하는 일상을 살고있는가?당신의 신분은 가슴의 손을 얹고 어디쯤인가?
넷. 결혼의 이유
왕자도 공주도 없고 스스로 알아서 산다면 왜 둘이어야 할까? 살기 충분한 돈을 벌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살 수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 지속적인 지지와 심리적 유대감.그리고 나누면서만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 내 돈으로 사는 가방과 남자가 사주는 가방의 가격은 같아도 기쁨의 크기는 분명 다르다.
최근엔 좀 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처음 예랑의 가족들과 인사하는 식사자리. 명품가방이라고 쓸 만한 게 두어 개 있었는데, 오래되었지만 무난한 검은색 프라다를 골라 나름 차려입고 갔었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는 길, 그날 처음 본 10살 어린 셋째 시누이가 말했다. 올라가는 길에 언니 가방 사주라며 예랑이에게 300만 원을 입금해 주었다. 10년째 들던 프라다 지퍼 옆에 고리가 다 해진 걸 본 모양이다.
그날 내 차림이 단출했나 보다. 옷도 가방도 신발도 가지고 있던 것들로 원래 나처럼 꾸몄을 뿐. 시댁에서 본 나의 첫인상이 사치 안 해서 좋아 보였다는 후문. 흠.. 명품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돈을 어딘가 꽤 씁니다.
첫 번째 든 감정은 '멋지다.' 자본주의 신여성, MZ 시누이는 자기 존재를 이렇게 멋지게 증명하는군. 시누이가 사준 가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더 값진 가치였다.
두 번째 감정은 미안했다. 차라리 혼자 살겠다 외치며 느지막이 결정한 결혼이었다. 통제 밖의 미지의 시댁과 시누이까지 둘이라 막연한 공포를 느꼈었다. 가족... 내가 누군지 알기 전에 환대해 준 그이들이 참 고맙다.
결혼의 이유 중 하나는삶의 영역 확장이다. 배울 만큼 배웠고 원 없이 이것저것 해봤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내가 모르는 많은 세계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겪은 것들과는 다른 영역.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춰가는 게 또 하나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아직은 시작이지만 매우 해볼 만한 것 같다.
이 동화의 끝이 무엇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결말이 아닌순간이다.기혼이든 미혼이든 오늘 이 순간 행복한지 스스로 점검해 보자.가정의 평화는 나의 행복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