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오기로 결정하고 막연하게 해보고 싶던 한 달 살기를 이번에 해보자 싶었다. 평소의 나라면 즉흥적으로 결심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용기였는지 한 달 살기를 입 밖으로 내뱉고 현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탓에 2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혼자서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고, 가장 길게 갔던 여행은 3박 4일이 전부였기 때문에 한 달이라는 긴 여행은 나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다.
호기롭게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내심 걱정이 많았다. 가족들도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가겠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너무도 쿨하게 ‘그래’라는 짧은 대답으로 나의 여행을 받아들였다. (우리집 실세는 엄마라서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실 떠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마음이 흔들렸고, 실천이나 행동이 느린 탓에 못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한 달 살기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역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강원도와 제주도 두 곳을 놓고 지역을 고민했지만 바다가 가까웠으면 좋겠고 지금 있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면 좋겠다고 우선순위를 정리하면서 지역은 제주도로 확정했다.
그 후 나는 출퇴근길에 틈틈이 숙소를 찾았다. 일주일 내지 열흘 정도 옮겨 다니면서 생활을 할 계획이었고, 첫 숙소만큼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몇 날 며칠을 검색을 거듭해서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애월읍에 있고 사람들이 몇 명 머물지 않는 곳이자 살짝 외진 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사람들하고 부대끼는 게 싫었던 나에게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1인실로만 구성되어있고 작은 베란다도 있어서 창밖으로 바다를 보면서 넋 놓기 아주 좋은 장소. 애월읍의 숙소 예약을 시작으로 남쪽과 동쪽 숙소도 예약을 마쳤고, 필요한 물품을 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두었다.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일
- 일기 쓰기
- 패러글라이딩
- 셀프 촬영
- 요가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고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엄마는 제주도에 코로나가 너무 심하며 걱정을 많이 했다. 덩달아 나까지 걱정이 됐지만, 안심용으로 본 타로에서는 괜찮다고 하기에 나는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취소할 수 없다고 얘기한 후 홀연히 떠났다.
제주공항을 도착했을 땐 설렘과 살짝 두려운 마음도 생겼지만, 20kg가 넘는 상당한 무게의 캐리어 때문에 그 기분은 아주 잠깐밖에 느끼지 못했다. 일단 짐을 숙소를 옮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택시를 타고 첫 번째 숙소까지 움직였다. 공항을 벗어나자 저 멀리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아주 작고 멀리 있는 바다였는데, 보자마자 비로소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면서 괜히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제는 혼자라고, 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지내라는 스스로의 다독임에 느낀 감정이었다.
이번 한 달 살기를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의견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이었다.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종류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먹고 싶은 건 뭔지, 하기 싫은 건 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 달 살기’라는 수단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내 우선순위에 나는 없었다. 그렇게 끝없이 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까마득해져 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생각보다 기분 나쁘고 때로는 먹먹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빠진 나의 삶은 무의미해졌고, 나를 점점 더 지치게 하는 요소가 될 뿐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또렷해지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기를 바랐다. 그리고 혼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제주도 도착 첫날에는 식사메뉴 선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애매하게 도착해서 점심도 굶은 상태라 배가 고픈데 뭘 먹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고민하다 결국은 그 시간에 열린, 가장 가까운 가게에서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 때쯤 조금씩 하고 싶은 일과 먹고 싶은 것들이 생겨났다. 뭐가 먹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를 계속 되물었던 것 같다. (나와 눈치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내 생활 패턴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초반에는 쉬는 방법을 몰라 하루에 여행지를 두 곳, 세 곳씩 갔고 하루에 1-2만보씩 쉬지 않고 걸었던 탓에(뚜벅이 여행자라 이동 거리가 엄청났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뻗어버렸다. 언니의 ‘한 달 살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받고, 제주도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조급했던 마음은 사라졌고, 편안하고 느릿한 일상에 적응해갔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된다는 여유와 내려놓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버스를 놓치고 싶지 않아 죽어라 달려서 탔다면, 지금은 버스를 놓치더라도 다음 버스가 있으니 기다리자 싶어 졌고,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불안감과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저 평화롭고 기분 좋은 시간만 가득했다.
가장 좋았던 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외진 곳에 있는 카페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말을 안 해서 너무 좋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 외에 필요한 말을 제외하면 말을 할 일이 없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생각보다 많이 지쳤구나, 힘들었구나, 내가 그걸 몰랐네’ 싶었다.
일할 땐 전화를 계속하면서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일을 하고 나면 사람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항상 이어폰을 꽂고 살았는데 거기서 빠져나오니 그제야 보였다.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사람한테 너무 지쳐서 이곳으로 그토록 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말소리 대신 풀벌레가 우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파도치는 소리, 고요한 정적만 가득해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괜찮았고, 오히려 마음이 채워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하면서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라는 생각이 항상 머물렀는데, 이곳에 와서는 ‘이렇게만 살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 나를 이렇게 바꿔놓은 제주도의 모든 시간이 더없이 귀하고 소중했다. 불편한 마음 없이 나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버킷리스트의 ‘일기 쓰기’도 이와 같은 이유로 적어두었다. 이번 긴 여행의 목적은 ‘나를 좀 더 이해하기, 들여다보기’ 였기에 솔직한 감정을 적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도착한 첫날부터 쓰기 시작했고, 일기에는 있었던 일과 계획했던 일, 그날의 느낀 감정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내가 나에 대해서 발견한 점에 대해 기록했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감정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 했고, 나를 방치한 시간이 꽤 길어서 말로, 생각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제주도에 머무는 내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감정을 정리해서 쓴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긍정적으로 와닿았고, 긴 여행이 마무리될 즈음 나는 일기장 속의 나와 많이 친해진 듯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것을 좋아하고, 이럴 땐 이렇게 움직인다고, 자연을 꽤나 사랑하는 사람 같다고, 나를 너무 의심하지 말라고,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 어떤 종류의 여행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한 달의 시간으로 인해 나는 지금부터 꽤 많은 변화에 기로에 설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이 시간을 버팀목 삼아 내가 나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일기장에 새긴 ‘나의 모습’
- 느린 사람이고, 그 느림을 애매하게 좋아한다
-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 끊임없이 걷는 여행을 즐긴다
- 면보다는 밥을 좋아하고 종종 군것질을 한다
- 비 오는 날은 무섭지만, 비 오는 소리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