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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

by YUN

제주도에서 돌아온 나는 예전과 달리 여유를 되찾았다. 시간에 쫓기듯이 살았던 때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고, 휴식을 수용한 순간 내가 나를 처음으로 수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과거에는 해보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우선시 했었지만 지금은 ‘해보고 싶은 건 일단 해보자’ ‘고민만 하다가는 바뀌는 게 없을 거야’ ‘지금이 가장 빠른 때야’라며 하고 싶은 건 해도 괜찮다고, 해보고 아니면 다시 하면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이렇게 바뀔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마음에도 휴식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가장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고, 나의 의지만 있다면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예전에는 공부를 하라고 하면 어쩜 그렇게 하기 싫었는지, 한참이 지난 지금은 ‘통역 없이 외국인과 대화해보고 싶다’라는 목표가 나를 영어공부로 이끌었다. EBS 고3 문법 강의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급할 것 없다고, 하나씩 쌓아가자 싶었다. 그 꾸준함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공부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은 더없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만 떠나고 싶었다. 멀리가 아니어도 좋으니 새로운 걸 보고, 느끼고, 숨 쉬고 싶어졌다. 우연한 기회로 강화도에서 진행한 체험형 레지던시를 참여하게 되었다. 3박 4일간 지역에 머무르며 그곳에 정착한 청년들, 다양한 예술인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짧은 시간이고 혼자가 아닌 언니와 함께하기에 참여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가는 길도 멀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도착한 다음날 만난 룸메이트가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웃는 모습이 아주 예쁜 친구였는데,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질문하며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 속에서 이곳에 온 이유가 나와 같다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원래 색이 엄청 뚜렷했는데, 일하면서 제 색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라며 이곳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니, 그 사실에 큰 안도감과 위로를 얻었다. 무의식 중에 내가 희미해지는 걸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혼자 예민하게, 유난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당신의 고민은 나와 또 다른 이들도 하고 있는, 해야만 하는 고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사람에 질려서, 무서워서, 싫어서 피해 다녔는데, 결국엔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안도하다니. 도망쳐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은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돼버린 순간이었다.


강화도에서 머릿속을 비우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겪은 일들과 현재의 고민을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이곳에 오기 전 'WANT'라는 독립출판사에서 일대일 글쓰기 클래스를 진행한다는 글을 보고 문의를 했었다. 글 쓰는 목적에 따라 취미로, 원하는 장르에 맞춰서 커리큘럼을 진행한다는 답변을 받았고, 고민에 빠졌다.


글을 정말 쓰고 싶은 건지, 쓰고 싶다면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건지에 대한 답을 명확하지 않아 망설였다. 하지만 막연했던 고민은 강화도에서 만난 룸메이트와의 대화로 정리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WANT’에 문의를 했다. 처음 글쓰기 수업을 문의한 지 약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선생님은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과 답변을 해주었고, 여기라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에 수업료를 지불하고 다음 주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을 만났다.


나의 선생님은 따뜻하고 배려가 많은 분이었다. 수업 첫날 선생님의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덤덤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가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고, 사람에게 닫혀있던 마음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조금씩 허물어졌다.


글쓰기 수업을 고민했던 한 달의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매주 수업일이 다가올 때면 기분이 좋았고, 설레었다. 선생님과의 만남이, 수업하는 공간이, 같이 일하는 최 이사님이, 마스코트 빵빵이(귀여운 아기 고양이)까지 온전히 날 품어주는 느낌이 들어 편안했다. 낯선 타인에게 느끼는 아주 오랜만의 편안함이었다.


이곳에서는 밝은 사람인척 하지 않아도 됐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여졌다. ‘WANT’는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든든한 뒷배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 적인 신뢰를 받는 것 같았다.

선생님과 수업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을 온전히 글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감정을 밖으로 꺼내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헤맸지만 그마저도 선생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할 수 있을 거라며 조용한 응원을 보냈다. 선생님의 마음이 용기가 되어 나에게 전달됐다.


그래서였는지 몇 년 동안 고민하고 미뤄두었던 앞머리를 잘랐다. 누군가는 ‘그걸 왜 고민해, 해보고 아니면 기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일을 할 때 돌다리를 수십 번씩 두드려야 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려 본 후 움직여야 하는 나는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0부터 10까지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 자동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들은 두려움이 돼서 나를 압박한다. 물론 시작하고 나면 생각했던 것에 비해 별 것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뚫고 시작하는 일이 언제나 항상 어렵고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떤 도전이든 계속해보려 한다. 답답하더라도, 힘들더라도 이런 나도 나라는 사실을 인정해보려고 한다.


그래도 경험을 통해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생각이 많은 내 성격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행착오를 덜하게 하고, 후회도 적게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내 도전이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보며 ‘나와 비슷하다’는 동질감을 느꼈다면, 고민과 생각을 멈출 순 없겠지만 생각을 끝내고 일단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 세상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은 존재들이다. 아주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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