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일 외적으로 하는 말에는 반응조차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게다가 협찬 건이 생기기라도 하면 한껏 예민해져서는 3분 정도 연락이 안 되면 전화를 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나는 평일, 주말 상관없이 연락받으면서 단 한 번도 ‘밖이라서 못 봤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일하면서 처음으로 미용실에 갔을 때 연락을 못 받았다. 전화가 오기 3분 전까지도 카톡으로 협찬사에서 요구한 자료를 찾아서 캡처한 후 바로바로 보냈는데, 전화가 안 되는 그 3분의 시간을 못 참는 것이었다.
정말 미용실 예약을 왜 했는지 내 손이 미웠고, 기다리는 미용사분께 너무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차라리 내가 미용실로 출발하기 전에 연락했으면 전화해서 취소라도 했을 텐데. 속이 터졌다. 전화를 못 받은 이유를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밖이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그랬더니 ‘너만 밖이냐며, 본인도, 협찬사 직원도 밖이라며’ 핀잔만 돌아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급하면 당신이 찾아서 보내면 되지 않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머리를 하는 내내 전화는 계속됐고, 미용사분이 머리를 감겨주는 그 순간에도 전화를 받았다. (미용사분이 계속 울리는 전화에 받아도 된다고 해주었다) 대본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CG 하나가 잘못 들어가 있었다. 나도 놓쳤고, 메인 작가님도 놓쳐서 그대로 협찬사로 넘어갔고, 그걸 발견한 협찬사 쪽에서 얘기가 나왔다.
그걸로 메인 작가님은 나에게 제대로 확인 안 했냐며 전화로 있는 화 없는 화와 짜증을 다 냈다. 내 실수가 맞기에 죄송하다 했지만 이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구성원이 대본을 확인하는 건데, 정작 대본을 쓴 본인이 왜 최종 확인을 안 하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한참을 씨름한 후에 일이 매듭지어졌고, 나는 머리를 하고 방송용 대본을 뽑으러 회사로 향했다. 이날은 하루가 엉망진창이었고,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나는 정신이 너덜너덜했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쌓이면서 나는 입 밖으로 ‘그만둬야겠어’ ‘그만둘래’라는 말을 습관처럼 자주 했다. 불과 7-8개월 전에는 아무 말도 못 했던 사람이었는데, 사소한 불만조차 얘기하지 못했는데 새삼 놀라웠다. 아마 H언니와 막내작가 K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발판으로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만큼 지쳤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주말에 예고 없이 무작정 자료를 요청하는 연락도 한몫했다. 밖에 있다가도 연락이 오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상황이 몇 번 생기면서는 쉬는 날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불안감에 계속 대기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핸드폰을 1분에 3번씩은 확인했다)
스트레스는 방송 전날이 가장 심했다. 대본이 늦어질 때면 아나운서부터 출연자들, 판넬 담당자 등에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건 해야 했고, 대본도 정돈되어있지 않아 글씨체, 글씨 크기, 장평, 자간 등 섬세한 것까지 맞추려니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놈의 장평, 자간은 모두가 몇 번이고 확인해도 꼭 한 군데씩 반영이 안 된 곳이 있었고 그럴 때면 메인 작가님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일정이 밀린 탓에 방송 전날 새벽에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일정에 3-4시간밖에 자지 못한 채 출근했고(중간에 대본이 몇 차례 빨리 나와 지하철을 퇴근한 적도 있다. 그런 날이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방송을 끝낸 후에도 회사로 돌아와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보통은 아침 방송을 끝낸 후 퇴근한다)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 달았을 때, H언니는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나의 버팀목이었던 H언니의 말에 나의 인내심도 툭 하고 끊어졌다. 그리곤 나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작가가 연달아 그만두니 메인 작가님은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결심이 굳건했기에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H언니는 인수인계를 해주고 나갔고, 나는 약 한 달 뒤 5월 5일 어린이날 특집을 마지막으로 방송한 후 퇴사하기로 결정됐다. 나가기 전에 후임 서브 작가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었으나, 원하는 연차의 작가를 찾기가 어려웠다. H언니가 나간 후 들어온 작가님의 소개로 왔던 분이 있었지만, 생방송이 처음이라 부담스러워하며 3일 정도 인수인계를 받다가 떠났다. 결국 나는 인수인계를 하지 못한 채 마지막 방송을 하고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막내작가 K와 새로 온 서브 작가님이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더 있고 싶지는 않았다.
프로그램을 하는 8개월 동안 많은 일이었다. H언니와 나, 막내 작가가 서로 끈끈하지 않았다면, 친하지 않았다면, 관계가 단단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회사를 나갔을 것이다. 지칠 때마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거나,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점을 얘기했고, 두 명만큼은 내가 화가 났던 일이나 느꼈던 생각들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소소한 기억들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만으로 다시 같은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마지막 방송을 끝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즐거웠다. 발걸음은 가볍고, 날씨는 화창하고, 그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은 채 서울 나들이를 짧게 즐긴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분명 몇 시간 못 잤는데, 어떻게 놀러 다닐 기운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