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시름 덜었지만, 문제는 건강 코너였다. 촬영과 녹화를 하는 모든 과정이 어려웠다. 기본적인 실수를 하고, 체크할 것들을 놓치면서 정말 꾸역꾸역 진행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 건강 VCR 녹화가 끝나고 건강 코너 작가님들께 따로 불려 가 혼이 났고, 작가님들은 ‘정말 최선을 다한 거야?’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서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오기로 그렇게 대답했다(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인정했다) 2년 차 작가님은 ‘처음부터 어떻게 잘해’라며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고, 그 말에 씁쓸했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한 회, 한 회 녹화가 진행될수록 맨 처음보다 나아졌지만, 넘치는 일과 2주에 한 번씩 밤을 새울 수밖에 없는 일정, 메인 작가님에 대한 낮은 신뢰 그리고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이 반복될수록 프로그램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났다.
결정적으로 메인 작가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두고 싶은 이유 중 가장 컸다. 프로그램 회의를 하다 보면 메인 작가님은 작가들 편이 아니라 팀장, PD들 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개선될 사항을 얘기해도, 꼭 PD들을 대변하며 말을 했고 작가들의 힘듦은 뒷전이었다. 입봉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내레이션이나 구성안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고(입봉 할 때는 메인 작가님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명확한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아 스스로 발전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답답한 마음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 와중에 막내 작가는 옆에서 계속 도와줘야 했으며(그녀가 안쓰러워 화를 내 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일도 힘겹고, 겹쳐지는 상황들이 좋지 않았다), 코너는 계속 변경되어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템, 형식에 적응하느라 버거웠다. 밖으로는 차마 말을 못 하고, 속에서는 항상 천불이 나고, 그 화를 혼자 식히느라 애썼다. 나는 말 못 하는 병에 걸린 건지, 과거의 일이 발목을 잡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꿋꿋이 견디고 있었다.
그때 즈음 막내 작가는 말없이 잠수를 탔다. 연락을 받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이런 상황이 올까 봐 최대한 막내 작가의 편에 서서 일을 도와줬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가장 낮은 연차라는 이유로 막내 일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 작가가 잠수 탔다는 소식에 메인 작가님이 급한 막내 일을 나에게 처리하라고 했다) 정말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진짜 나가라, 나가라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제발 6개월까지만 버티자 싶었다. 그래야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 경력이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정말 필사적으로 버텼다.
막내 작가 일을 계기로 건강 코너 작가님들이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메인 작가님에게 얘기하면서 ‘막내일 윤이가 도왔고, 막내 작가를 잡는 게 아니라 윤이를 잡아야 한다, 토요일은 막내 CG 수정해주고 일요일은 자막을 쓰느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며 나를 대신해 소리를 내줬다(제대로 휴일이 있지 않은 것에 관해 얘기하려 이야기를 꺼낸 것일 수도 있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정말 고마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문득 메인 작가님을 제외한 다른 작가님들이 있었기에 프로그램에서 버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합류한 2년 차 작가님도 내게 힘이 많이 되어줬던 사람 중 하나였다.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짚어내는 사람.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본인이 해야 할 일과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제대로 짚고 넘어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그런 점이 너무 배우고 싶었다. 낯을 가리는 내 성격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래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녀와 친해졌다. 비슷한 코너를 하고 있었고, 연차도 비슷해 의지가 되었다. 알면 알수록 그녀가 좋아졌고, 동경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시간이 갈수록 힘든 상황 때문인지 서로가 더 편해졌고 새로 투입된 막내 작가와의 합도 잘 맞았다. 아주 밝고 싹싹한 성격의 아이. 일이 힘들 법도 한데, 웃음을 잃지 않았던, 마른땅에 비를 내려준 아주 고마운 친구였다. 성격이 다들 동글동글해서 나와 2년 차 작가님, 새로 투입된 막내 작가와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돈독해졌다(카트라이더라는 게임을 같이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_^)
이로써 작가진은 재정비가 되었지만, 프로그램은 안정이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개편이 이뤄졌다. 스튜디오 비중이 컸던 기존과는 다르게 VCR 비중이 더 확대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전면 VCR로 개편을 계기로 건강 코너 담당 작가들은 프로그램을 나가게 됐고, 나와 2년 차 작가님은 8-10분짜리 VCR 담당에서 20분짜리 VCR을 담당하게 되었다. 건강 코너 작가님들은 하루아침에, 메인 작가님에게 통보받고 좋지 않은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떠났다.
내가 많이 따랐던 4년 차 서브 작가님이 회사를 나갈 때와 모양새가 비슷했다. 메인 작가님과 이야기를 하고 온 건강 코너 작가님들은 들어오자마자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이번 녹화가 마지막이라는 말에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또..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쳐내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짜증이 팍 났다. 메인 작가님을 향해 반발심이 생겼고, 그나마 얕게 깔려있던 신뢰는 완전히 깨졌다. 믿을 만하지 못한 작가이자 어른이라는, 책임감이 없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나와 2년 차 작가님 앞에 떨어진 20분 분량의 VCR도 그랬다. 본사에서는 작가가 움직이며 인터뷰하는 활기찬 느낌을 원한다고 우리에게 전달했는데, 나는 ‘우리 보고 그걸 하라는 소리인가’ 싶었고, 2년 차 작가님은 그렇게는 못 한다고, 그러면 본인은 회사를 나가겠다며 짧고 명확하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분량도 너무 부담스럽다고, 입봉 한 지 6개월도 안 됐다고 얘기했지만 (분량은 2배가량 늘어나면서 페이를 올려준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까라면 까라는 건가) 작가진은 두 명이 공석이었고, 바뀌는 VCR은 당장 다음다음 번 녹화 때부터 해야 하는 상황에 나와 2년 차 작가님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담당했던 VCR과 결이 완전히 달라 장소와 등장인물에 대한 스토리가 필요했고, 자막과 내레이션 스타일도 모두 다르기에 감을 잡느라 비슷한 방송을 계속 돌려봤다. 메인 작가님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우리 둘은 정말 죽을 둥 살 둥 해서 겨우겨우 진행했다. 주말을 반납하고 촬영을 힘들게 잡고, 촬영 전날부터 당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 촬영 구성안을 작성해서 보냈다.
수정을 한 차례 하고 끝났다는 안도감에 몇 시간 만에 노트북에서 눈을 뗐다. 창밖을 보자 새벽 여명을 볼 수 있었고, 우리는 터덕터덕 회사를 나섰다. 퇴근하면서 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옆에 2년 차 작가님이 함께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든든함을 느꼈다. 항상 혼자였는데, 다른 누군가의 존재는 이렇게 힘을 주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촬영이라는 급한 불을 끄고 메인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메인 작가님은 프로그램이 코너 변경이 아닌 완전한 개편(프로그램 구성 자체가 바뀌는)이 있을 거라고 전달해줬다. VCR이 크게 나눠질 것 같다고, 20분짜리 VCR이나 8-10분짜리 VCR 하나가 들어갈 것 같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가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한차례 이야기를 더 했지만, 메인 작가님은 우리에게 20분짜리 VCR을 하는 작가 서포트+틀이 안 잡힌 짧은 VCR을 제안했다. 결국 막내일도 같이 하라는 것, 세상에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힘들게 서브 작가로 올라왔는데, 또다시 막내 일을 하라는 것도, 정체성이 없는 VCR을 하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틀이 잡히지 않은 VCR은 여태껏 코너 변경을 하면서 경험한 거로 충분했다. 나에게 득이 될 것도, 내가 할 이유도 없어 2년 차 작가님과 나는 둘 다 그 자리에서 내일 녹화까지만 하고 나가겠다고 말한 후, 그날 밤 회사 짐을 다 챙겨서 나왔다.
불과 6개월 전의 나라면, 혼자였다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못했을 것이라고 100% 확신한다. 2년 차 작가님이 나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줬고, 옳고 그름이 뭔지, 희미하지만 그 선을 알려주었고 그것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무언가 맞지 않는다고, 부당하다고 판단이 되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그냥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