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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퇴사(1)

by YUN

방송 일정 때문에 회사를 나오고서도 주말에 두 번 정도 자막 작업을 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했던 코너가 온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입봉 했던 프로그램을 떠나보냈다. 뿌듯함보다는 시원하고 후련한 마음이 컸고, 당분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정말 짧고 굵게, 아주 굵게 일했다) 회사를 나온 후의 삶은 전쟁 같았던 어제와는 달리 집 근처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사는 지역의 청년지원사업 공간에서 심리상담을 운영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언젠가 한 번쯤은 상담을 받아야지’라며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지금, 타이밍 맞게 기회가 주어졌다. 이유 없는 우연은 없겠다 싶어 결국 신청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과거의 일이 계속 내 안에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들었고, 그 기억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내 발목을 잡는 것 같았기에 당시에 내지 못한 용기를 이제야 냈다. 그 당시에는 슬펐다가, 힘들었다가, 우울했다가, 맑아졌다가 감정이 소용돌이를 쳐서 헤매느라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들었고, 그저 그 안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발버둥 치기 바빴다. 1년이 지나서야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졌고 이제는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상담사 선생님은 인상이 좋았고, 내게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노력했다. 선배 작가와 있었던 일들과 내가 살아온 방식에 관해 얘기하는데, 거기서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몇 번이건 그때 일을 말하려고 하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문득 내 삶의 주체가 누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란스러웠다.


그제야 나는 괜찮았던 게 아니라 괜찮은 척하면서 그냥 묻어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당시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부터 어떤 일이 생기면 나는 계속 피하고 덮기 급급했던 것이다. 상처는 그냥 두면 낫지 않는다. 더욱이 그 상처가 깊고 덧나기까지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선배 작가와의 일이 방점을 찍으면서 그 당시에 나는 나를 향해 공격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서는 말했다. ‘너무 착한 것 같아요. 그리고 윤 씨의 삶인데 윤 씨가 없어요. 아이를 다 키운 50대 어머니의 모습이에요’ 나는 선배 작가와의 일을 더는 마음에 두고 싶지 않아서 갔던 것이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들킨 기분이었다.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항상 우선이었다,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편하면 된다고 여기며 살았다. 처음으로 ‘그렇게 살지 말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 인생인데 내가 조연처럼 살고 있었나 싶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나의 비밀이 처음으로 꺼내어졌다.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나를 위한 한 줄 글쓰기’ 숙제를 내주었다. 내가 나를 보듬는 짧은 글을 써보는 것. 상담받고 온 날 처음 쓴 글은 ‘마음속 무거운 비밀을 꺼내놔 줘서 고맙다’라는 메시지였다. 상담받은 직후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후 오늘 그 시간은 내가 나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느껴졌다. 2020년 8월 20일,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지역에서 지원해주는 심리상담은 세 번까지 할 수 있었기에 나는 두 번째 상담을 예약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2년 차 작가님께 연락이 왔다. 아는 작가님이 소개를 해줬는데, 서브 작가 두 명을 찾고 있다고. 모니터링을 해봤는데 VCR 분량도 짧고 어렵지 않은 것 같다며 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모니터링을 했다. 전화로 들은 것처럼 VCR 분량이 짧았지만, 건강프로그램이었고, 지난번 프로그램에서 사례자를 찾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기에 선뜻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편으론 조금 더 이대로 지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믿고 의지했던 2년 차 작가님과 함께하는 일이니 일단 이력서를 보내고 생각하자 싶었다. 2년 차 작가님께 이력서를 전달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 면접 연락을 받았다. 건강프로그램의 메인 작가님은 둘 다 면접을 보더라도 안 붙을 수도, 한 명만 붙을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이야기를 듣는데 괜히 기분이 별로였다...) 회사 근처에서 2년 차 작가님과 만났고, 함께 회사로 들어갔다.


대표님과 뒤늦게 도착한 메인 작가님 두 분이 면접을 봤는데, 면접이 아니라 합격한 후 프로그램 설명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전화로는 둘 중의 한 명만 될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나 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무겁게 집으로 돌아왔다.


해볼까.. 아니면 안 한다고 할까.. 고민하다가 2년 차 작가님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좋았고, 다음 프로그램을 같이 한다는 게 든든해서 결국엔 출근을 결정했다. 회사(제작사)는 그 건강프로그램을 처음 맡아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틀이 없었다. 다만 대표님이 예전 그 프로그램을 해봤던 분이라 필요한 자료들은 넘겨주었다. 초반에는 다들 갈팡질팡했는데 이건 당연한 순서였다.


개편을 하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던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일.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서 막내 작가를 빨리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고를 올린 후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메인 작가님은 경력이 없는 아이들이 많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와 2년 차 작가님은 달랐다. 그렇게 일이 어렵지도 않은데 굳이 경력이 필요한가 싶었고, 충분히 가르치면 할 수 있는 일이라 면접을 봤던 사람 중에 가장 좋았던 친구를 뽑아달라고 말했다.

막내 작가로 출근한 아이는 곧고 바른 아이였다. 프로그램 초반에는 일이 정신없이 밀려들었고, 내 일, 네 일할 것 없이 2년 차 작가님과 나는 서로를 도왔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방송이면 나와 2년 차 작가님은 한 회차씩 나눠서 VCR을 진행하는 게 맞다. 그래야 사례자를 찾는 일도 부담이 덜하고, 쉬는 날도 보장받을 수 있다)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첫 방송 전에 다른 제작사 방송일에 참관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방송 준비하는 방법부터 필요한 일들을 살피고, 배우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메모했고, 우리는 방송 때 그걸 참고해 방송 준비를 했다.


건강프로그램은 사례자를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는데, 가뜩이나 이 프로그램은 출연료가 너무 낮아서 찾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곳저곳에 연락하고, 센터에도 연락을 취해보고, 설득도 하고. 매번, 회차마다 사례자를 힘겹게 찾으면서 하루빨리 우리 제작사 시스템이 안정되기를 바랐다. (안정화되지 않으면 여러모로 신경 쓸게 많아서 힘이 든다)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프로그램은 여전히 시간에 쫓겼고, 섭외한 스튜디오 출연자(대학병원 교수)들에게 대본을 재촉당하기 일쑤였다.


일하는 내내 항상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와 H언니(2년 차 작가님이 말을 편하게 하기를 원해서 호칭을 바꾸고 반말을 시작했다)는 아등바등하면서 시간 내에 사례자를 어떻게 해서든 찾으려고 했다. 찾아야 하는 시간 내에 해결이 안 될 것 같을 땐 메인 작가님께 연락해서 다른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 것 마냥 대본은 항상 녹화 전날이 돼서야 나왔고 출연자들의 재촉과 화는 모두 우리의 몫이었다. H언니와 나는 출연자들이 더는 우리 제작사가 만드는 방송에 나오지 않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인 작가님의 대본은 점차 빨라지나 싶다가도 점점 늦어졌다.


분명 초반에는 본인도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어느 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스스로 타협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쓰는 게 안 된’ 다며 우리에게 얘기했다. 스튜디오 대본의 분량이 엄청나고, 내용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메인 작가님을 재촉할 수 없어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대본이 늦게 나오면 모든 방송 준비가 뒤로 밀리는데, 종편을(VCR, 화면에 띄우는 CG를 만들고 마무리하는 곳) 하는 곳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늦는다며, 다른 제작사는 몇 시 정도에 끝나는데 우리만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의문을 가졌다.


대표님과 피디님은 메인 작가님에게 조용히 얘기를 해봤지만, 그마저도 반영이 잘 안 되었다. 메인 작가님도 본사에 들어가고 부장님들께 연락을 받고 아마 정신이 너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고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우리보다 경력이 20년 이상 많은 분인데, 능력치와 경험치가 다를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첫 방송 전날, VCR 녹음 시간 안에 내레이션을 다 쓰지 못해 H언니와 메인 작가님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많이 부족하고, 어설픈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메인 작가님의 일을 확인하고 챙기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확인을 안 하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메인 작가님은 대본을 작성하기 전 출연자들과 통화를 원했고, 나는 통화 가능 날짜와 시간을 잡아서 성함과 연락처, 통화 가능 시간을 적어 보내줬다. 하지만 메인 작가님은 출연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출연자들은 전화가 오지 않았다며, 내게 연락해왔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핸드폰이 울릴 때면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메인 작가님의 비서처럼 어떤 출연자랑 내일 전화하는 거 잊지 않으셨는지, 통화 시간이 지난 뒤 연락은 했는지, 또 며칠까지 이 일을 하셔야 한다고 했는데, 하셨는지 하나하나 확인해야만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긴 했지만, 인격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인성이 좋지 않은 분은 아니었기에 꾹꾹 참았다. 하지만 A라는 아이템(주제)을 다루면서 그마저도 사라졌다. A 아이템을 하면서 담당 부장님이 메인 작가님을 재촉했는데, 그때마다 메인 작가님은 그에 맞는 사례자를 찾아야 한다며 나에게 3주간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거듭했다.


A라는 아이템 촬영을 진행해야 할 때 즈음 나는 내가 조사했던 출연자들의 정보를 타이핑해서 메인 작가님께 드렸다. 처음에는 두 명 정도 사례가 좋다고 했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 A라는 질병을 앓게 된 게 너무 오래되었다며 사무실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 나는 A라는 질병이 만성질환인데 어떻게 완치가 있을 수 있냐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건 나한테 얘기하지 마’ ‘생각해봐 너는 말이 되니?’였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럼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부장님한테 직접 연락할 수도 없었는데. 심지어 같이 일하는 피디님에게 전화해서 ‘이런 사례자가 있는데 10년 전에 앓았대’라며 비꼬며 통화했다.


3주 동안 동동거리며 알아본 사례자 정보는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메인 작가님은 당신과 나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님에도 언성을 높였고, 그 자리에 없는 피디님한테까지 전화해 내가 힘들게 일한 결과물을 하찮게 여기며 얘기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화장실로 향했다. 화를 가라앉히느라 애썼다. 엎을 게 아니라면 참아야 했다.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얘기했고 결국엔 사례자 없이, 전화 연결만 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 일로서 그나마 ‘인성이 괜찮다, 지랄은 하지 않는다’라는 나의 인식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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