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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망쳐야겠다(2)

by YUN

다음날 가장 오랜 연차의 메인작가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다른 메인 작가님, 팀장님 등 각각 한 명씩 돌아가며 총 네 명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게 가장 힘들었는지, 프로그램을 옮겨준다던지,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프로그램을 옮겨준다는 말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아무리 프로그램을 옮긴다고 한들 선배 작가와 같은 건물인데 한 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다. 팀원들의 설득은 계속됐지만, 퇴사를 하겠다는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다시는 날 시궁창 속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기에.


메인작가님 중 여장부 스타일의 작가님이 점심시간에 나를 따로 불러 산책을 하자고 했다. 유일하게 내 마음을 보듬어준 사람. 그분은 프로그램을 옮겨준다고 하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저 힘든 걸 몰라줘서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그 한마디로 눌려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마음을 펑펑 다 쏟아내고 나서야 멈췄다. 내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구나 싶었다.


그때 다른 한 분이 떠올랐다. 내가 퇴사를 결심하기 전,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 ‘별일 없지’라고 자주 물어봐주던 긴 머리 메인 작가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에서 막혀 내뱉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에서 더는 희망을 느낄 수 없었고, 어떤 일이 생기든 나 때문이라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믿었던 선배 작가와 사이가 틀어진 후 더 이상 누군가를 믿기가 어려워졌고, 더구나 긴 생머리의 작가님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뢰가 가지 않았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 정도는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배 작가와의 나의 골은 깊어만 갔고, 선배 작가는 긴 생머리의 메인작가님께 자신의 옆자리였던 나의 자리를 이동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그쪽에서 나를 밀어 내주면 너무 고맙다고, 당신하고 멀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던, 무슨 말을 하던 그 무엇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긴 생머리의 작가님은 선배 작가와 이야기가 끝난 후 나에게 “내일부터 내 옆자리에 앉자”라고 했고,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다른 테이블, 긴 생머리 작가님의 옆자리로 옮겨 갔다. 사무실 작가들의 책상은 [ㅗ] 형태였다. 그녀의 자리에선 내가 가려지고, 내 자리에서는 그녀가 가려지는 구조였다. 선배 작가의 옆자리를 벗어나니 숨이 쉬어졌다.


몸을 누르던 큰 돌이 그나마 작아진 느낌이 들었다. 얼굴만 안 봐도 이렇게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이렇게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현실에 좌절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믿고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이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남은 시간 동안 선배 작가와 더 이상 부딪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일은 해야 했고 단체방과 요일별로 쪼개져있는 톡방에는 그녀와 내가 함께 들어가 있었다. 그 톡방이 나를 다시 한번 옥죄어 왔다. 자리가 멀어지니 목소리가 들리는 횟수는 적어졌지만, 채팅방은 분주했다. 선배 작가는 말 대신 톡으로 업무지시를 했다. 그러다 퇴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선배 작가에게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일할 때 오버하지 마’라는 메시지. 여장부 작가님이 너 너무 오버해서 일하는 것 같다고 하잖아’ 밑도 끝도 없는 말. 퇴사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숨통이 틔였고, 일을 조금 더 열심히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굳이 왜 들어야 하나 싶었다. 지금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내 생각을 알긴 하냐고,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그 말을 듣고 또다시 가라앉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 여겨졌다. 제발 조용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원했는데, 내 바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깨졌다.


이전 프로그램을 할 때, 선배 작가는 페이 문제와 공격적인 말투로 주변 사람들 사이에 평이 좋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걱정이 앞섰다. (그 당시에는 걱정할 만큼의 애정이 남아있었나 보다). 직접 얘기하기는 두려워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작가님께 말을 했다. 주변 이야기가 좋지 않다고, 이런 이야기가 돈다고. 선배 작가에게 말을 좀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작가님이 선배 작가와 얘기하던 중에 무심코 그때 일을 말했고, 나를 통해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배 작가는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함께 꼭대기층에 있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침묵이 깨지고 한층 날이선 목소리와 말투로 ‘네가 뭔데 그런 얘기를 전해’ ‘나한테 말했어야지’라며 나를 쏘아붙였다.(모든 말이 분풀이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막대해도 괜찮은 사람인가 싶었다) 걱정이 되었다는 나의 말에는 ‘네가 뭔데 내 걱정을 해, 같이 얘기한 사람들한테 연락 다 할 거야’라며 신경질적인 말들을 쏟아내고는 ‘내가 여기 사장이었으면 너랑 같이 일 안 했어, 당장 해고시켰지’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또다시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나는 누군가를 걱정할 자격도 없는 사람인가 싶어 비참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그녀가 제발 사무실에 없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퇴근을 했는지 자리가 비어있었고 나는 도망치듯 짐을 챙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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