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고 선배 작가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퇴사 전날이 되었다. 3일 후면 한국을 떠나 있을 테니 머릿속에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 드디어 벗어나는구나 싶었다. 나는 퇴사를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을 계획했다.
선배 작가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조차 쉬기 싫었고, 운이 나빠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겁이 났다. 집에 계속 남아있는다면 어디에서든 전화나 문자가 올 것 같아 미리 차단하고 싶었고(핸드폰에 선배 작가의 이름이 뜨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온전히 내편인 사람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낯선 곳에서 바쁘게 지내면 선배 작가는 내 삶에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 없이 증발되어버리겠지 싶어 블라디보스토크를 갔다가 바로 제주도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퇴사 전날은 다른 때보다 여유로웠다(그만두는 날짜가 정해지면서 나는 떠날 사람이기에 주어지는 일의 양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날 다른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선배 작가가 다가오더니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그게 그 사람과 나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서류를 보내려고 자리에 앉았다. 이게 마지막 일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빨리 마무리를 하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을 끝마칠 때쯤 나를 아껴주었던 피디님이 다가왔다. 고생했다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다음 프로그램에 가서는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티를 내라고도 덧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고, 방송에서는 그런 것도 필요하다는, 어리숙한 나를 걱정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사실 좀 억울했다. 스스로의 일을 하는 것뿐인데 그걸 왜 티를 내야 하나 싶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세상이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자리에 있는 내 물건들을 가방으로 옮겨 담았다. 그전부터 차근차근 짐을 옮겨두어 남아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지막 퇴근을 할 때는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엇을 했나 싶어 서글펐고 불편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얻고 가는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아 억울했고, 슬펐고, 분노스러웠다. 당분간 이 근처는 절대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로 씁쓸했고 지겹던 회사를 빠져나왔다.(선배 작가를 최대한, 아주 오래, 가능하다면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지막 송별회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출연했던 출연자도 와있었다.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중간 즈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다며 눈물을 보이는 작가님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작은 위안을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내가 외면받았다는 사실에 배신감도 들었고, 왜 나는 말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자책감도 들었다.
난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너무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누구도 내게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이어진 회식에 나는 다음날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른 가서 씻고 눈을 잠깐 부치고 짐을 싸야겠다 싶었다. 어서 떠나야지, 그들이 없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