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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라는 뫼비우스의 띠 (2)

by YUN

정신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나는 나의 작은 빛이 되어줄 동기를 언제나 기다렸다. 나와 같은 위치에서 함께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웠다. 팀장님은 나를 보면 입버릇처럼 ‘구하고 있어’ ‘곧 구해줄게’ ‘힘내 파이팅’을 외쳤다. 그로부터 한두 달 정도 됐을까, 출근해서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낯익은, 있으면 안 될 얼굴이 보였다. 내 첫 프로그램을 그만두면서 인수인계를 해줬던 후배였다.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데 그 순간 ‘안 되는데..’라는 마음이 들었다.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후배 작가와 그날 방송을 무사히 끝내고 뒷정리를 하면서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힘든지('야근은 거의 매일', '이것부터 저것까지 해야 해' 등)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남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부디 이곳을 나가서 다른 좋은 프로그램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나만 생각한다면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 좋았겠지만, 이 친구는 나와 같은 수순을 밟지 않았으면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배 작가는 그다음 날 자신이 없다며 팀장님께 연락하고는 나오지 않았고, 막내작가 공고는 다시 올라갔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지나고 있었고, 날이 갈수록 나는 점차 살이 빠져갔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들어온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몸무게 앞자리가 바뀌었고,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은, 화장실조차 가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때 즈음 실수가 더 잦아졌고, 잘하던 일마저 실수가 거듭되었다. 어느 날은 또다시 선배가 나를 비상구 계단으로 불렀다. 또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잔뜩 긴장한 채로 선배를 따라나섰고 선배는 계단을 내려가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던지며 소리 질렀다. “시발, 너 나랑 장난하니? 대체 왜 그래?” 이유도 몰랐다.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겠고 그냥 내 눈앞에 있는 그녀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나에게 대답을 원했고,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입을 떼고 한마디 하는 순간 그녀는 내 말의 열 배로, 따끔거리는 가시 돋친 말을 또다시 쏟아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비상구 계단 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이 아닌 화장실로 향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먹이기 시작했고, 결국엔 화장실에서 숨을 죽이며 펑펑 울었다. 나는 잘 울지 않는 편이었다. 보통은 영화나 드라마의 슬픈 장면에서 만 울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쏟아내야 했다. 안 그러면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사무실과 가까운 화장실이라 소리를 낼 수 없어 더 서럽고 서러운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서 아무 일 없는 듯 자리로 가서 일을 하고, 다시 혼이 나고, 또다시 혼나는 이유를 모른 채, ‘나의 잘못이다, 내가 문제야’ 이 말을 되뇌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고, 나는 점차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팀장님은 새로운 막내작가라며 그 친구와 나를 인사를 시켰다. 작지만 단단해 보였고, 동갑이라는 말에 서로 의지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내 오른쪽 자리에 앉은 단발머리의 친구에게 내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 후, 급한 것만 끝내고 설명해주겠다고 말하면서 프로그램 대본을 보내줬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오후가 되자 급한 섭외 건이 생겼다.


고시원을 촬영해야 하니 장소를 섭외하라는 선배 작가의 말. 장소 섭외를 해본 적이 없어 헤매다가 서울에 있는 고시원들을 먼저 정리했다(방법을 묻고 싶었으나,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선배 작가가 '너 전화 안 해?'라며 물었고 나는 그 말에 움츠러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고시원에 전화해서 통화하는 내내 선배 작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옆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통화가 끝난 후 “그렇게 말하면 섭외가 되냐”며 새로 온 막내작가 앞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나무랐다.


그 이후에도 실수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자리에서 바로바로 얘기하며 화를 냈다. '이거 했어?' '왜 아직도 안 했어' '언제 할 거야' '이거부터 빨리해서 나 줘' 쏟아지는 말들과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을 쏘아댔다. 다른 작가님들의 일과 방송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던 나는 새로운 막내작가를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방송 준비를 할 때,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틈틈이 알려줬지만, 그런 노력에도 선배 작가는 왜 아직도 알려주지 않았냐며 나를 몰아붙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막내작가 친구는 상황 파악이 됐는지 내 말을 듣기보다는 본인이 편한 대로 움직였고, 실수가 생겼을 때 다시 방법을 알려줘도 그 말들은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막내작가와 일하는 조연출들이 내게 연락하는 일이 많아졌다. 새로운 막내작가가 어떤 부분을 잘못 알고 있다고,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작가님이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얘기를 좀 해달라는 부탁의 말들. 몇 번이고 다시 알려줬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간단한 촬영 스케줄을 잡는데도 문제가 생겼다. 당장 촬영을 나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과 인터뷰가 불가능한 구성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모두 편집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고, 각자의 힘든 점과 입장 차이를 정리했다. 잘 해결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왔고, 나는 새로운 막내작가의 일로 계속 연락을 받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선배 작가의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그 친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선배 작가와 있는 채팅방에서 일이 주어지면 먼저 확인하는 법이 없었다. 본인의 일은 줄이고 실속은 잘 챙기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결국 나는 먼저 확인하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은 계속 쌓여갔다. 나는 항상 야근을 했고, 그 친구는 언제나 칼같이 퇴근 시간을 지켰다. 일이 내 쪽에 몰리니 선배 작가는 '네가 지금 이걸 할 수 있어? 못하면 말을 해 새로 온 막내작가한테 주게' 라며 일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과 선배 작가와의 문제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새로 온 막내작가가 주는 스트레스까지, 나에게 생기는 일들이 점차 버겁고 버거워지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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