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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라는 뫼비우스의 띠 (1)

by YUN

2018년도, 처음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을 때 만난 작가님께 전화가 왔다. “이런 곳이 있는데, 거기 PD님이 나랑 친하고, 엄청 좋은 분이셔, 면접 봐볼래?” 일을 쉰 지 오래되어 선뜻할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보자 싶어 면접을 보기로 결정했다. 크고 반짝이는 고층의 건물, 긴장이 됐지만 마음을 숨기고 건물 안에 들어섰다. 검은색 가죽재킷을 입고 강한 분위기를 풍기는 메인작가님이 나왔다. 겉모습과 달리 유쾌하고 인자한 말투. 나는 그렇게 그분과 일하게 되었다.


출근 첫날 면접 때와 마찬가지로 큰 건물 앞에서 ‘할 수 있다’를 되뇌고 들어갔다. 나를 반긴 건 내 바로 위에 선배 작가였다. 작가 구성원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는데, 모두 연차가 높았고, 가장 적게 나는 나이 차이는 7살이었다. 지난번 회사에서는 차이가 더 많이 났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선배 작가는 나에게 상냥했고 부드러운 말투를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길었고, 같이 먹는 식사 횟수도 가장 많았다.


그 선배를 좋아했고 따랐던 나는 항상 이대로 지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 깨져버렸다. 같이 손발을 맞춰 일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어쩌면 그 전인지도 모르겠다. 점차 선배와 나와의 사이가 삐그덕 됐다. 선배는 일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가 한글파일로 작성해서 CG팀에 넘긴 CG 작업물(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그래픽 화면)을 같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선배 작가 눈에 잘못된 정보가 눈에 띄었다. ‘하. 이거 아니잖아, 제대로 확인 안 했어? 여기에는 이거라니까? 대체 너 왜 그래’ 날이 선 말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내가 쓰는 대본이 아닌데 어려운 단어 하나하나까지 어떻게 알고 있나 싶다가도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이니 내 잘못이 맞다고 수긍했다. (주로 오타나 잘못된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서 팀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쌓이면서 선배의 화는 점차 커져갔고 작가 1년 차인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허덕이고 위축되며 살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회사는 계약 문제로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고, 그 혼란의 중심엔 막내작가들이 있었다. 가장 민감한 페이 문제와 계약조건(정규직/계약직 등)이 걸려있어 모두 예민해진 시기였다. 이유를 모르겠으나, 내가 회사와 계약한 후 더 예민해진 선배 작가를 감당해야 했다. 그녀는 바늘처럼 뾰족했고 나는 계속해서 그 뾰족함에 찔리고 있었다. 혼나는 횟수와 기간이 늘어났고 나는 모든 상황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자존감과 자신감을 점차 잃어가는 나날이었다.


다시 한번 혼란의 시간이 찾아왔다. 내가 속해있던 프로그램은 종방이 결정 나 메인작가님을 제외한 세 명(나, 선배 작가, 10년 차 작가)은 새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에 합류하라는 회사의 지침. 기존 프로그램과 신생 프로그램을 같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더욱 고되었다. 그러던 중 선배 작가는 “이번에 프로그램 옮기면서 입봉 해야 하지 않아? 말해줄 테니까 입봉 하자”라고 말했다. 고마움, 부담스러움, 무서운 마음, 깜깜한 미래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내 안에 펼쳐졌다. 그래도 해보자 싶었다. 마치 이번이 아니면 나는 평생 막내작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해내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하겠다고 한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기존 프로그램 마지막 방송을 하고 새로운 팀에 출근했을 때 내 앞에 놓인 건 두 사람 분량의 일이었다. 막내작가의 일과 서브작가가 되기 위한 일. 도망가고 싶었다. 여기서 있다가는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일을 하는 쪽을 택했다. 이미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누군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꼭 그래야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는 출근부터 방송이 끝나는 오후 6시까지는 막내작가로서의 업무를 하고 그 이후부터 밤, 새벽까지는 서브작가의 일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스케줄. 그렇게 애를 써도 실수는 계속됐다. 선배 작가의 말은 점점 사나워지고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그 눈빛은 나를 얼려 부술 것만 같았다.


한 번은 촬영 때 나갈 소품이 있었는데, 그걸 챙기지 못했던 적이 있다. 담당 PD가 그 선배에게 전화해서 알게 된 건데, 그 선배는 내게 소품을 챙기라고 한 적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알고 챙기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 선배는 나를 나무랐다. 그렇게 사무실 자리에 앉아 혼나다가, 비상구 계단으로 끌려가서 혼이 났다. 본인이 어떻게 하나하나 챙기냐며 온갖 감정을 섞은 목소리로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사무실도, 비상구도, 복도도 무서웠다. 어딜 가든 그 선배가 있는 것만 같았다. 의기소침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 ‘Y’에게 전화를 걸었고,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보통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말을 하기 마련인데, 나는 오히려 그 선배가 유리한 쪽으로 말을 하고 ‘Y’에게 내가 잘못한 점과 충고를 해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2-3번씩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그러면 안됐다. 나의 친구’Y’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적어도 나만은 내편이 되어주어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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