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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10.

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by 아난



대학시절은 그다지 즐거운 기간이 아니었지만 나 같은 부적응자도 좋아하는 과목이 하나쯤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Art History, 즉 서양미술사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일단 교수님의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강의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말씀이 다소 빠르셨기 때문에 교수님의 유머를 모두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목소리나 말투 자체가 워낙 따뜻하고 유머러스하셨기에 뜻도 모르고 큭큭 거릴 때도 많았다. 교수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유구한 미술사를 함께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강의하셨다. 지루해지기 쉬운 역사 강의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한쪽으로 쏠렸던 이유는 어지럽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미술의 특성 때문이었다.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분야인 설치 미술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설치미술과 전통적인 미술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시하는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비물리적이고 비물질적인 콘텍스트(Context)까지도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설치는 사진, 회화, 조각, 비디오 같은 다른 미술 분야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포괄적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안에 관객을 포함시킬 수 있기에 전통적인 관객과 작품의 일방적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마음대로 작품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느낌 때문에 당혹감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설치미술가 서도호, 미대 나와서 무얼 할까


이렇듯 기존의 격과 문법을 부수고 새로운 표현방법을 찾는 것이 현대 미술이다. 편견을 내려놓고 새로운 분야, 잘 몰랐던 무엇에 대해서 알아가고자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공부했다면 그 불편함을 줄여나갈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한테 꼭 붙어서 낯가리는 어린애처럼 돌아보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어떤 점에선 전통적 회화라는 것이 나의 특성과 워낙 잘 맞아서 그런 것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 회화라는 것은 그림 안에 소재와 주제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다. 이러한 정의는 중세기(Middle Age)의 고전 미술의 정의와 가깝다. Art History 수업은 그래서 더욱 나에게 정신적 안식처처럼 다가왔다.


교수님의 강의를 더 듣고 싶었던 나는 교수님이 학교 밖에서 하시는 다른 강의까지 따라다니며 들었다. 미술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였다. 유료 강의였고 내 학점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만큼 난 미술사 강의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강의실의 프로젝터에서 나온 한줄기 빛이 커다란 스크린이 되어 눈앞에 띄워지고, 그 위에 빛나고 있는 옛 대가의 그림을 보면 난 왠지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작은 나라는 존재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대가와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그의 고귀한 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20대의 혼란과 시름을 한 순간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수업 과제 중 지금도 기억나는 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에 관한 에세이를 써오는 과제였는데 이때 교수님이 주문하셨던 것은 딱딱하고 아카데믹한 글이 아닌 재미있는 스토리를 지어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단편 소설처럼 써오라는 말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겐 기꺼이 할 만한 숙제였다. 생각보다 이 과제를 했던 것이 흥미로웠던 까닭인지 여전히 미술사 강의를 떠올리면 내가 이 과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쓴 스토리는 대략 이러하다. 때는 1229년, 프랑스의 비가 억수로 퍼붓는 밤이다. 여행 중이던 나그네, 조슈아(Joshua)가 비를 피하고자 거대한 대성당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수도사 존(John)에게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성당의 건축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는 이야기다. 최근 책의 원고를 쓰면서 나는 그때 썼던 에세이를 다시 꺼내 읽어보게 되었다. 내가 언제 이런 글을 썼을까 싶을 정도로 신선하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풋풋하던 한 대학생의 맑은 감성과 생각이 오롯하게 녹아들어 가 있었다. 비록 패기 있고 멋진 대학생활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닥 상처 받지 않고 아직은 꿈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의 내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쭉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세월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구나 싶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변하게 만들지만 대부분 그것을 또렷하게 감지하기는 힘들다. 세월에 휩쓸려 육체의 청춘과 마음의 청춘을 잃고, 결국 본래 자신을 잃어가고 잊어간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점점 퇴보하고 있는 것일까?

갈림길에 선 느낌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림이 귀하게 여겨지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최근엔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이 국내의 두통약 패키지 디자인으로 쓰이는 것을 보고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제품에 고급스러운 요소를 넣고 싶은 회사의 입장은 이해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클림트의 작품과 두통약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뉴스 기사를 보자면 결과적으론 회사의 매출이 올랐다고 한다. 어디서 본 듯한 것, 유명한 것, 예쁜 것에는 사람들의 손이 잘 가는 것이 사실인가 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에 호응하듯이 이러한 어색한 기획도 계속될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얇은 포장지로 만들어져 쓰이고 버려지는 것을 보는 것은 왠지 아쉬운 일이다. 아쉬운 일이라 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말이다. 이런 것을 기꺼이 환영하는 소비자도 있을 것이고 당장 매출이 올랐기에 효과적인 마케팅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를 두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현대미술의 흐름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우리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안에 숨겨진 깊은 향기와 이야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명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던 폭력 영화가 보여주는 거친 이미지이든 간에 우린 이미 모든 것에 너무 무덤덤해진 채 그려려니 하며 살아간다. 정보는 어디든 과중되어 노출되어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피로하다.


이는 Sensitivity, 즉 어떤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느끼는 힘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술적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것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실을 가려내는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짜 뉴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정보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이 시대에 진실을 보는 눈과 들을 귀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등대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과 같은 시기에 옛 대가들의 그림을 응시한다는 것은 그래서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지만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어떤 감각들이 그것들에는 여전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 많은 작품은 정신적인 감응 혹은 위대한 무언가 (The Great Beyond)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게 비춰준다. 물론 시대적 특성상 종교, 신화, 역사를 담은 그림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점을 너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게 느끼게 해 주고 인간이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해 뜨겁게 생각하게 해 준다.


색색의 물감을 직접 갈아서 만들고 낮엔 햇빛에 의존해서 밤엔 호롱불에 의존해서 천천히 붓으로 한 획 한 획 그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아날로그적인 작업방식도 이러한 느낌을 한층 가중시킨다. 그들 작품 안의 그러한 실체성과 묵직한 존재감은 우리로 하여금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빵으로 연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다시 한번 말해주는 동시에 잃어가는 감수성의 불씨를 되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Madonna and Child enthroned between angels and saints (Detail), Domenico Ghirlandaio

"(angels, those mystical creatures)... they belonged to the past in such a fundamental way, that part of the past we have put behind us, that is, which no longer fit in, into this world we had created where the great, the divine, the solemn, the holy, the beautiful, and the true wre no longer valid entities but quite the contrary, dubious or even laughable. This means that the great beyond... no longer found expression... Art does not know a beyond, science does not know a beyond, religion does not know a beyond, not anymore. Our world is enclosed around itself, encolsed around us, and ther is no way out of it. “


"(천사, 그 신비로운 존재들은...) 우리가 뒤로 한 과거의 어느 시점에 공고하게 예속되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의 세계 - 위대하고 신성하고 엄숙하며 성스럽고 아름답고 진실된 무엇이 살아있는 가치로써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받고 웃음거리가 되는 - 이러한 세계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무엇 (The Great Beyond)이 표현될 방법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은 이제 저 너머의 무엇을 알지 못한다. 과학 역시 저 너머의 무엇을 알지 못한다. 종교도 저 너머의 무엇을 알지 못한다. 더 이상은. 우리의 세계는 그 자체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여기엔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다."


- Knausgaard, Karl Ove의 My Struggle: book 1에서 발췌


다시 고전 미술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완전히 탈바꿈한 이 시대에 과거의 형태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전통이라고 하는 과거의 미술도 그 시대에는 ‘혁신’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미술사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내린 결론은 지금 나의 시대와 내 눈 앞의 현실을 조금 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이 21세기도 르네상스 못지않은 엄청난 혁신이 일어나는 놀라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시대가 Karl Ove라는 소설가가 지적했듯 ‘위대하고 신성하고 엄숙하며 성스럽고 아름답고 진실된 무엇이 살아있는 가치로써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받고 웃음거리가 되는’ 그러한 세계는 아니었으면 한다. 우리는 지독하게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상처 받은 10대 소년 소녀처럼.


내가 바라보는 한국은 지식인들로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회는 명쾌함보다는 어딘지 공허하고 씁쓸한 뒷맛이 느껴질 때가 많다.


무엇이 빠져 있는 것일까?


이 시대의 예술가의 역할은 이 물음표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답이 아니라 비전 (Vision)이다. 좀 더 높은 동산에 우뚝 올라서서 전체를 조망하고 그것을 발견해서 보여주는 것.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섬과 같은 외로운 개인들이 아닌 하나로 이어진 생명체로써의 자신을 다시금 느껴보게 하는 것.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존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Art knows a beyond, as it always has been.

예술은 그 너머를 알고 있다,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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