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비전 있는 미술학도에서 낙제생으로.
대학교가 있었던 토론토는 일단 도시 자체가 밴쿠버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욕을 하며 걸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받아야 했다. 밴쿠버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밴쿠버의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찻길을 지나갈 때도 사람이 횡단보도에 발을 한발 내딛으면 신호등이 있던 없던 일단 차가 멈추는 곳이다. 거리는 깨끗하고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공기 좋은 고장이기도 하다. 반면 토론토는 거리도 복잡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고 산과 바다가 없는 평평한 내륙 도시였다. 나는 서울로 상경한 시골쥐 마냥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토론토가 진짜 지저분하고 별로인 도시라는 뜻이 결코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당시 어린 나의 눈에 그렇게 비쳤을 뿐. 지금은 밴쿠버도 옛 시절의 그때와 달리 가파른 인구 증가와 함께 꽤나 터프한 도시가 되어 있다.)
이 거칠고 빠른 템포를 지닌 도시가 낯설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생활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작품을 보자면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실력이 모두 평균 이하처럼 보여서 실망스러웠다. 모두 서툴고 진지한 느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과의 관계도 멀게만 느껴졌다. 밴쿠버에서 선생님과 그러했듯이 그림과 삶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진 인연을 꿈꾸었지만 그런 개인적인 시간이나 친분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교수님들은 바쁘신 분이었고 중요한 건 낯선 그분들에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학의 수업시간에도 과제로 해온 그림을 함께 보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있었지만 왜 그런지 시들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대학이란 게 이런 거였나 싶은 회의감과 외로움이 들었다. 내가 가고 싶은 다음 단계(Next step)를 보여주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모든 게 제각기 돌아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의 단면도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자신감도 있었고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에서 나는 어쩐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따뜻한 둥지 밖으로 나와 헤매고 있는 작은 새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런 나를 더더욱 기운 빠지게 했던 일화가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3D Principle (3차원 조형물의 원리)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평면적 회화 작품이 아닌 입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과목이었다. 1학년이라면 누구나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당시 나는 입체 작품을 만드는데 영 소질이 없었다. 단순히 노력 부족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평면 작품을 할 때에 비하면 통 자신이 없었고 뭘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그 과목을 지도하는 교수님도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미술과 조형물에 대한 철학이 워낙 확고한 분이었기에 잘 따라가지 않으면 날카로운 비평을 서슴없이 하는 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과목은 조금 과장되어 말하자면 지옥 관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달까.
나는 우연히 아는 한국 남자 선배와 그 과목을 함께 듣게 되었는데 선배는 너무도 수월하게 멋진 작품을 뚝딱뚝딱 만들어왔고 교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았다. 그에 반해 나는 매번 과제를 할 때마다 애를 먹었고 과제점수도 형편없었다.
한 번은 교수님께서 너무도 호되게 비판을 하셔서 꽤나 울적해지기도 했다. 독창적인 자신만의 의자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오라는 과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과제를 해보자는 생각에 나는 종일 집에서 나무와 클레이(clay)를 주물럭거리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나름 내 눈으로 보기엔 특이한 의자였는데, 그걸 수업에 가져가서 공개하는 순간, 교수님은 내 작품을 목청껏 비판하셨다. 아무런 콘셉트가 없는 엉터리 작품이라고 하시면서.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물론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단 3D 작업을 어떻게 든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만 있을 뿐, 작업을 하면서 중심 되는 콘셉트를 갖추는데 신경 쓰지 못했다. 어쩌면 과제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냥’ 만들었던 것 같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비평에 어깨가 축 처지고 모든 의지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호된 비평받아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한국 선배도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난 이 과목에서 결국 낙제점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다시 이수를 받아야만 했다. (돌이켜보건대 1학년의 기본적인 필수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걸 내가 해냈다.)
다른 과목들을 들을 땐 다행히 이 정도로 충격적인 일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일이 간혹 있었다. 현대 미술과 그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 있었는데 이 수업은 나에게 또 다른 난해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 수업을 통해서 이름 있는 현대작가의 작품을 몇몇 살펴보게 되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작품들이 종종 있었다. 왜 이런 것을 굳이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인지 대략 난감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은 내가 작가의 콘셉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지만 보고 멋대로 판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순진한 시골쥐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에곤 쉴레의 적나라한 누드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간혹 등장했다. 개중에는 수업을 듣던 중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독실한 기독교인 학생도 있었다. 그 정도로 수위가 센 작품들을 종종 감상(?)해야만 했다.
이렇게 난 내가 기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캠퍼스 생활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떠돌고 있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그냥 벅차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가정 상황도 여러 가지 변화가 많았던 불안정한 시기였고 큰 맘먹고 벌였던 연예사업은 나에게 사랑의 단맛보다는 쓴 맛만을 가득 선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께서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주셨지만 이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혼자 떠돌고 있었다. 뭔가 의미 있고 생산적이어야 할 대학시절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난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는 격노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좀비 같은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난 그때까지도 나약한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누군가의 강력한 지도가 필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생활 안에서 질서와 균형을 건강하게 이루는 법을 체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같이 학교에 입학했던 화실 친구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그럭저럭 잘 견디고 적응해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시련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내가 보기엔 나만큼 우왕좌왕하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새삼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강한지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미숙함 그리고 혼란한 무력감을 극복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어떻게 해야 할지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배움이 느린 편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대학생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멘토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예술 계통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겐 더더욱 그렇지 않나 싶다. 예술분야는 자칫 잘못하면 자유와 방종을 혼돈하기 쉬운 분야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예술혼은 방탕함과 혼란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D 조형 수업에서 낙제점을 맞은 것은 어찌 보면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평면적인 차원에서는 알고 있는 것을 3D, 즉 현실적 플랫폼에서는 전혀 구현하지 못하는 나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Idle mind is devil's workshop"
(나태한 마음은 악마의 놀이터다.)
솔직히 미술대학에 다니면서 없던 그림 실력이 확연하게 늘거나 그림에 대해서 내가 모르던 뭔가 아주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하면 그 또한 과장이자 비약이겠지만 남들보다 길게 5~6년 정도 대학에 등록금 내고 다니면서 얻어낸 것이 엄청 대단한 거라고는 말 못 하겠다. (이건 어디까지 나의 개인적인 경험임을 밣힌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대학시절에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우들은 의미 있는 수확을 했으리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미술대학이 필수코스라는 말은 못 하겠다. 미술대학은 완벽한 배움의 전당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느낀 미술대학은 넓은 마당이었다. ‘자리 깔아 줄 테니 뭐든 원하는 거 한번 해볼래? 봐줄게. 들어줄게.’ 하는 그런 곳. 정보의 허브를 열어 줄 테니 뭐든 궁금한 것을 열어보고 배워가라는 곳이다.
뭘 하든지 그건 본인의 선택사항이다. 자신만의 기획력과 목표, 탐구 분야가 분명하지 않으면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시간 낭비하기 딱 좋은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선생님이 제시해주신 디렉션을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됐지만 대학은 달랐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체 학교가 이끌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큰 착오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티스트가 되는 조건은 미술 대학의 학위와 무관하다고 본다. 조건이 있다면 단 하나, 지금 이 순간 작품에 진지하게 매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아티스트이며 그것으로 충분한 조건을 갖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대학을 통해 배운 것은 있었다. 그것은 내가 미대를 통해 배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긴 해도 확실한 배움이었다. 나는 미술 대학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작은 사회를 체감했다. 사회는 그림 그리는 기술 하나만 가지고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도 필요하고 능청맞게 견디는 내공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맞춰 나갈 수 사회성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절실한 마음, 정성 어린 마음이 없으면 실패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학교를 만만하게 보고 약간의 오만함과 나태함에 빠져있던 내가 깨달았던 건 그런 것들이다. 어디 학교뿐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실제 세상에서 필요한 기술들이었다. 순진하고 바보 같았던 시골쥐가 넘어지고 구르면서 점점 알게 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삶은 가끔 아주 낯선 현장으로 우리를 떠밀 때가 있다. 그 이질감이 싫어서 도망치려 애쓰지만 나오는 방법은 졸업장을 따거나 죽거나 (퇴학하거나) 둘 중 하나다. 새로운 것을 무조건 거부하고 과거만 멀뚱히 바라보며 있다면 그것은 현재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진 틀을 깨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부분은 그런 틀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함으로써 좀 더 성장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망치지 않고 두 눈 똑바로 뜨고 그것이 뭔지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미대는 그림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미대는 파격破格, 즉 기존의 낡은 격을 깨부수는 실험장이었다. 고등학생이 이제 어른으로써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아름답기보다는 '와장창'에 가까웠지만 그랬기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40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나는 앞으로 인생에 또 어떤 새로운 장을 열릴지 알지 못한다. 그 미지의 장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은 공존한다. 그래도 적어도 20대의 그때처럼 헤매면서 도망만 치고 싶지 않다. 물론 또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좀 더 기꺼이 맞이하면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탈피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