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대학에서 회화과(Drawing&Painting)를 나왔지만 전시를 하고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졸업한 친구들이 전업 작가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수익을 창출하는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점은 미술대학을 나온 많은 이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시중에는 예술가로 굶어 죽지 않은 법 등을 기술한 다양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내가 보기엔 딱히 정답은 없다. 각자의 능력으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뿐이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수입원이 될 만한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어떻게든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었기에 그림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미술 재료를 파는 상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책의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언젠간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좋은 양서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 의사 선생님께서 책의 일러스트를 의뢰하셨고 그분의 제안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단순히 연필로 스케치한 몇 장의 일러스트로 시작했는데 일이 점점 커졌다. 선생님께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만화를 적극 이용하고 싶어 하셨다. 인터넷과 영상 미디어의 시대에 책에서 멀어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책의 글과 이미지가 반반씩 되면서 일러스트의 분량이 만만치 않게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새로운 것들을 배워야 했다. 간단한 키보드 단축키도 모르던 내가 컴퓨터로 일러스트를 그리는 법을 배워야 했고 거기에 더해서 인디자인(Indesign)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때론 집필 작업을 보조하는 차원에서 스토리를 써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들을 별도의 학습시설에 가서 배우기엔 시간과 비용이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인터넷을 검색해서 초등학생처럼 따라 했다. 처음 태블릿 펜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을 때를 기억한다. 대체 이걸 가지고 어떻게 그린다는 건지 싶었다. 분명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자면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잘 그려지지도 않고 속도도 나지 않아서 정말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워낙 새로운 분야이다 보니 어렵지만 흥미롭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인디자인을 처음 다룰 때는 참 감회가 새로웠는데, 그 이유는 전에 있었던 어떤 서글픈 일화 때문이다. 당시 나는 작품 화보집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던 친동생에게 화보집 디자인을 부탁했다. 빨리 만들고 싶던 나와 달리 느긋하고 여유로움에 넘치던 나의 동생은 속도를 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몇 차례나 닦달을 하고 용돈으로 회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동생이 사용했던 프로그램이 바로 이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컴맹이었던 나는 그것이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만 다룰 수 있는 대단한 프로그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냥 프로그램이다. 시간을 들여 침착하게 그 기능을 다루다 보면 알게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정말 아는 것이 힘이자 권력이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기대치 않게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디지털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내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과 기술력이 결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맛보게 된 것이다. 디지털 분야를 빨리 접하는 어린 친구들에겐 이 정도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난 뭐든지 새로운 것을 어답트(adapt)하는데 느린 인간이었다.
이 시기에 작업한 책 대다수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책이었다. 처음부터 어린이 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전달하는 이야기 책을 쓰기로 뜻을 모았는데, 그림 분량이 많이 늘어나고 내 그림체가 워낙 심플하고 둥글둥글하다 보니 어른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보였다.
책의 스토리는 없던 스토리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옛이야기를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담아 리메이크한 스토리였다. 늘 의사 선생님을 뵐 때면 단순히 의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아닌 교육자나 성직자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분이 만들어 낸 스토리를 읽고 있자면 그 맑고 투명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만든 책을 정식으로 출판할 수 있는 활로를 찾지 못한 점이다. 나는 이미 일러스트와 편집 일로 스케줄이 꽉 찬 상태였고 선생님도 항상 업무에 바쁘셨다. 그래서 그 당시 만들어 낸 책은 대부분 대형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Amazon.ca)을 통한 출판이었다. 즉 아마존 사이트에 가서 검색해야만 볼 수 있고 거기서만 구매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약 4권의 어린이 책을 출간했다.
지금 다시 그 책들을 들여다보면 디지털 아트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한 어리둥절 아마추어 씨의 솜씨가 묻어나는 게 보인다. 내 눈엔 그게 귀엽게 보이지만 독자들의 눈이 같겠는가. 지금이라고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잘 정리해서 정식 출판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냥 묻히기엔 너무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엔 언제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난 그때 만들어낸 책들이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은 이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부모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씀하셨던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마음 안의 동심을 터치하는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래 나도 이런 마음일 때가 있었어.’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 세계도 있었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그래도 되는 거구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의 거친 숨을 고르게 한다. 이러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된다.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인내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차이가 결국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