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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대충'

by 아난


최근 어떤 고질적인 습관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온라인 쇼핑을 할 때 드러나는데, 물건 하나를 고를 때 온갖 사이트를 헤집고 다니고 수많은 리뷰를 다 읽어봐야만 안심될 것 같은 강박적인 마음이 드는 것, 그렇게 해도 그 물건이 제대로 된 물건일지에 대한 의심이 계속 들어서 물건 하나를 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든다는 것. 물론 그게 매우 컴퓨터와 같은 고가의 중요 장비라면 발품 팔고 시간을 들일만 하지만 수면 안대 같은 단순한 제품이라면 어떤가.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도 특가 세일이 뜨면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필요없는 물건까지 사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는다.


완벽주의(完璧主義, 영어: Perfectionism)는 이루기를 원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다.

-위키피디아-


세상에 반드시 최상의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얻어야만 내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이 기대감은 나를 더욱 노력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불만스러운 온라인 쇼핑 구매자처럼 세상을 이리저리 헤매며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 적당히 만족하면 될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게 만들었다. 잊어야 할 과거의 실수와 선택들을 곱씹으며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돌이켜보면 20, 30대에는 이런 성향은 절정을 이루어서 적당히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쉬이 넘어가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수많은 사소한 일들에 붙들려 진짜 본질을 바라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고민하며 선택한 것들이 결국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할 때가 많았다는 것. 조금 손해보더라도 선택을 질질 끌지 않고, 미련없이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느덧 이런 삶에 본격적으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제 정보가 많아도 너무 많은 시대에 접어든 현실 때문이다. 완벽하게, 만족할 정도로 충분히 다 체크하고 싶어도 그 정보가 끝이 없다. 만세. 완전히 항복이다.


얼마전 매트리스를 하나 구매하려고 검색 탭을 누르자 셀 수 없이 많은 브랜드가 화면에 떴다. 침대 브랜드가 이렇게 많았다 싶을 정도로 처음보는 다양한 이름들이었다. 하나 같이 자신의 제품이 '최고' 내지는 '최선'이라고 자신만만하게 홍보하는 회사들이었다. '속지 마세요', '고객님은 지금 다른 회사의 마케팅에 속고 계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제일 잘 만들어요.' '침대 원조 맛집은 우리집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이 없던 과거에는 침대 하면 '에이스' 나 '시몬스' 둘 중 하나 고르면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압도적으로 선택지가 많아졌다. 파는 사람도 고생이지만, 사는 사람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런 어려운 선택들을 물건이 필요할 때마다 반복하게 되면서 너무 힘들었다. 생활용품 리뷰 전문 유튜버까지 등장하는 마당이다. 물건 하나 사는게 뭐라고 이렇게 힘들지? 쇼핑이 이렇게 험난한 일이었나? 할 정도로. 이런 식으로 검색을 일주일 넘게 하다보면 정말 인생 일대의 퀘스트를 하고 있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일이 이렇게 까지 심각해지는 이유를 생각하며 되짚어보면, 그 한가지 선택이 잘못될 경우, 보게 되는 손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매트리스를 한번 사면 적어도 5~7년은 너끈히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매트리스를 고르면 그 긴 기간을 고통받을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은 반드시 올바른, 후회없는 선택이여야만 한다. 알 수 없는 미래까지 예측하려하니 셈법은 더욱 심각하고 복잡해졌다.


생각을 좀 바꿔먹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쇼핑은 내겐 어려운 문제이지만,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맞았다. '틀려도 돼.' '정 아니다 싶으면 적당히 기회를 봐서 다른 걸 사자.' 실수에 좀더 관대해지기로 한 것이다. 때에 따라선 적당히 손해보는 것도 감수하자는 마음으로. 그리고 너무 먼 미래까지 계산하지 말고, 지금, 혹은 앞으로 일정기간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이라면 그것으로도 좋다라는 마음으로.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하나의 선택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고민에 쏟아붓기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만족하는 선에서 선택하고 일단 경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경험하고 경험을 통해 알게 되면, 다음에 더 좋은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 것이다.


[더 빠르게 실패하기]라는 책이 있다. 안 읽어본 책이다. 하지만 책의 제목을 봤을때 누구나 이 책이 주고자 하는 핵심 교훈은 바로 알 수 있다. 고민할 시간에 일단 행동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내 삶에서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한가지에 매몰되어서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 잘못된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대충'으로 나아가는 것.



2023_CKS_21254_0115_000(pablo_picasso_visage_no_192112630).jpg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살아 생전 약 5만 점의 작품을 남겼다. 매일 하나씩 그려도 5만점은 채우기 어려운데, 알고보면 그는 하루에 여러개의 작품을 동시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캔버스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무언가 하나를 완벽하게 끝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5만 점을 그릴 수 있었을까? 5만 이라는 양적인 측면에서 벗어나서 그토록 '창의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Every child is an artist.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he grows up.”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된 후에도 어떻게 예술가로 남느냐이다.



그는 한 평생 어린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묶이고 매이지 않는 그림,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의 플로우(flow)가 느껴지는 그림. 완벽함 그리고 완성과 거리가 먼 그림들을, 남들이 보면 낙서 같은 그림들을 겁없이 마구 마구 그려댔다. 그렇게 그려대는데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싶다. 나의 행보는 피카소와 반대였다. 몇 개도 안되는 소수의 그림을 완벽하게 그리려고 애썼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아지거나 발전하지는 못했다. '남들 보기에' 완성된 그림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을 위한 기준을 위해 그토록 공을 들이며 그린 그림들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방안을 어지럽히는 것도 싫어졌다. 사실 그림이든 뭐든 뭔가를 만들려면 집안은 금새 어질러지기 쉽다. 어질르기 싫다는 마음은 나의 행동반경을 묶어두고,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것을 저어하게 만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어지를 수 있는 마음, 대충, 대충 시도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약간의 각오가 필요하다. 내 안의 완벽의 기준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각오 그리고 독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같은 것들.


난 아직도 해결해야 할 쇼핑 리스트가 있다. 이제 필요한 건 청소기다. 매트리스 살 때처럼 고민하지 않고, 이제는 적당한 선에서 질러보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쇼핑은 행복한 고민이지만, 나에겐 행복한 고민이라기 보다는 잘못하면 끝없는 시간낭비로 가는 지름길이다. 창작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을 어설프더라도 이렇게 글로 쓰고, 허술한 그림들로 풀어내야 한다. 어린 아이와 같은 창조적인 대충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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