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여름인가.
비도 자주 오고, 아침부터 에어컨을 켜야 할 만큼 서재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어제 온종일 정리했던 서재이건만 집중력이 확 올라오지 않는다. 최근 집을 청소하며 실내 공간을 재배치하고 있다. 침실로 쓰던 방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침대를 들여놓았고, 서재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는 작업 등이 그런 것이다. 사실 다른 중요한 일도 많건만, 근래에 내가 최우선으로 두고 임했던 일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노동 아닌 노동이 적잖게 필요하고, 덕분에 허리가 삐끗하여 며칠간 한의원에 다니는 등, 누가 보면 집이라도 짓는 줄 알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공간 배치라는 것에 대해서 그닥 섬세하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지만 않으면 되고 필요한 물건을 찾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내가 움직이는 동선이 필요이상으로 복잡하다는 점.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이 사소한 불편을 반복적으로 날마다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 맞는, 즉 내가 움직이는 동선에 맞고, 나의 니즈를 반영하는 공간 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재에서 책상의 위치를 3번 정도 옮긴 후에야 나에게 가장 편안한 위치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구도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가장 안정적인 느낌이 들고 공간 효율성도 좋아졌다. 또한 미적으로도 그편이 나았다.
예전에도 실내 공간 배치를 신경을 아주 안썼던 것은 아닌데,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나라는 사람이 하는 일과 동선을 좀더 섬세하게 생각해보았던 것이 달랐고, 또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공간을 정리해나아갔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좀더 단순하고 본업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둥지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안정감이라는 것은 공간 안에 질서가 바로 잡힐 때 오는 법이다. 이번에 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침대를 들여놓게 된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이불을 깔고 자면 자는 공간의 이동이 잦아진다. 방 안에서도 그렇고, 때로는 자는 방 자체를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침대가 일단 들어가면, 그 공간은 휴식을 취하고 잠을 청하는 곳으로 온전히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주방에 있는 식탁도 좀더 멀끔한 것으로 바꾸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오래된 식탁을 두고 쓰고 있었는데, 4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고, 아직 쓸만하다는 이유로 놔두었는데, 볼때마다 뭔가 공간이 죽어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과감하게 식탁을 바꾸어보았는데, 밥을 먹는 공간의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손님을 초대해서 차라도 한잔 함께 하고 싶은 느낌으로 말이다. 비싼 식탁을 들여놓은 것도 아니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으나 접어두었던 테이블을 펴서 그 자리에 놓은 것 뿐인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나 싶을 정도다.
욕실은 어떤가. 욕실이야 말로 나의 자력으로 위대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 변기 시트를 교체해보았다. 전에 살던 주민이 두고간 비데부터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비데를 쓰지 않는 나로써는 불편했고, 그것이 깨끗해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맥가이버과의 사람이 아닌 나로썬 이런 교체가 쉽지 않았다. 유투브를 보고 따라하는데도, 중간 중간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헤매다가 마침내 그 모든 미스터리를 풀고 새하얀 새 변기 시트가 설치가 되었을 때 얼마나 뿌듯하던지. 물줄기가 한쪽으로 삐져나오던 샤워 헤드도 새로 바꿔 달았다. 변기 시트, 샤워 헤드, 사실 돈이 크게 안드는 제품들이다.근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산뜻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남의 집 와서 씻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제야 나만의 욕실로 재탄생한 것 같았다.
적지 않는 시간을 공간 재배치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렇게 공간을 나에 맞게 최적화 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에게 맞는 공간, 내가 안정될 수 있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길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디자이너들이 좁아터진 개인 사무 공간에서 일하게 놔둘 수 없습니다. 내 디자이너들은 결코 그런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겁니다. 높은 천장에 최신 설비를 갖춘 탁 트인 스튜디오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건 아주 중요합니다. 작업의 질을 위해 중요하지요. 디자이너가 가치 있는 디자인을 고안해 내려면 그런 작업 환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로버트 브러너 (전 애플 산업 디자인 팀장)
공간을 재배치하는 동안 생각한 것은 애플Apple사였다. 뛰어나고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을 자랑하는 일류 회사 애플. 단순히 전자제품이 아닌 인간의 철학을 담아내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 그런 회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관점, 감각은 어떠할까? 애플사 제품군은 통일성과 독창성이 강하다. 그것이 폰이든, 노트북이든 무엇이든, 누군든 바로 이것이 애플 제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통일성. 그와 동시에 독창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은 세련되면서도 매우 심플하고 직관적인 느낌이 담겨있다. 뭐랄까, 어설픈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무엇이다.
공간을 정리하려면 무조건 필요없는 물건을 버려서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엇나가면 공간은 메마르고 썰렁해보이며 불편하기까지 하다. (필요한 물건까지 죄다 버린 상태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냥 눈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깔끔함이 아니라, 생동감이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던가. 애플 스튜디오에는 단순히 업무에 필요한 물품만이 아니라, 자전거, 스케이트 보드, 다이빙 장비, 영사기 같은 재미있는 물건들도 다양하게 배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자유롭고 어질르고 놀아도 되는 아이들의 공간이 떠오른다.
난 솔직히 내 집을 그 정도로 자유롭고 독특하게 배치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허리를 삐끗할만큼 열심히 공간을 이리저리 조율해나아가면서 조금씩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중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 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이번 집 정리가 주는 의미는 평소 때와는 사뭇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