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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Apr 17. 2023

엄마의티셔츠는 늘어졌지만 마음은 펴졌다.

제가 산후 우울증이라구요?


아이는 웃고 나는 울었다.


거실에 있는 구글포토가 돌아간다. 5년 전 오늘... 8년 전 오늘...

내 사진은 거의 없고 아이 어릴 적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때 사진을 보니  출산 후에 머리가 많이 빠졌다가 막 듬성듬성  삐죽삐죽 다시 올라온 앞머리카락에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이다. 육아에 찌든 무표정한 얼굴에 윤기 없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채 매일 똑같은 면티를 걸쳐 입은 모습이 자존감 바닥이었던 그 시절 내 모습이다.


갓난아이를 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 크림하나도 흡수될 때까지 정성스럽게 바를 수 없었던 그때.

하루종일 아이랑 붙어있느라 제때 머리도 감지 못하고 저녁이면 녹초가 되어 신랑에게 밥다운 저녁도 잘 챙겨주지 못하던 그때. 다른 집은 아이가 우느라 정신없다는데 우리집 아이는 엄마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세상을 다 담아낼 것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요즘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다 옆 시선으로 언뜻 언뜻 어린 시절 아이의 웃는 사진이 구글포토에 나타나면 마치 처음 보는 모습처럼 이제서야 나도 아이를 보고 웃는다. 그때는 왜 아이 웃는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까?

너무 그리운 순간, 다시 돌아간다면 오롯이 웃는 아이의 모습을 내 눈에 내 가슴에 담아둘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때 내가 산후 우울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늦게 가진 아이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젊은 엄마들보다 뒤쳐지기 싫어 육아정보를 검색하며 최신육아트렌드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 강박들로 조금의 여유도 없이 오로지 아이만 바라보며 내 모든 걸 다 쏟아내던 때였다.


산후우울증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 없이 찾아와 나와 아이손을 붙잡고 떨어질 듯 말 듯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지금 바보처럼 뭐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잠시 정신이 들면 이 아이를 그 누구보다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열의를 다해 책을 읽어주었다. 밤새 모유수유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오감을 자극시켜 주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그렇게 마음이 맑은 날과 흐린 날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바뀌었다.


육아는 지나고 나야 그냥 물 흐르듯이 두어도 잘 자라는 게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별거 아니겠지 하는 것들은 좀 더 마음을 기울여 보듬었어야 한다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렇게 아이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자라는 게 육아다.


산후 우울증에서 벗어난 날


내가 산후 우울증이라는 생각도 못하고 지내다  산후우울증에서 벗어났던 날 신랑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우울증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내가 산후 우울증이었다고?'

아니 어째서 내가 그런 상태일 때 우울증임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정신 좀 차리고 기분 좀 업 시키라고 정신이 들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남편은 늘 예민한 나를 보면 조심스럽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산후 우울증같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정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 오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었다고...


본인도 퇴근하고 돌아와 힘들었을 텐데... 지쳐 축 쳐진 나의 얼굴과 아빠를 보며 활짝 웃는 아이얼굴을 번갈아보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제와 듣고 보니 남편도 우울증이었구먼.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날을 확실하게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 아이의 얼굴도, 산책길 나무도, 하늘도, 다 이뻐 보이고 모두 다 행복해 보였으니까.


어지럽혀진 집안을 보고도 웃을 수 있었고 먹다 흘린 아이의 밥상도 웃으며 닦아 줄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향해 무표정이 아닌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웃으며 투정이라도 부릴 수 있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던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왜 기분이 다운되고 저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짐처럼 느껴지고 있는지 나에게 물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내 마음 한 곳에 구겨져 있던 나의 생각들이 되살아났다.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원하던 결혼을 하고 내가 원했을 때 아이도 생겼고, 아이를 낳으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육아도 착착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이를 잘 키우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뱃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온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생각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 영영 늘어진 티셔츠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금요일밤 맥주 한잔하던 달콤함도 사라지겠구나. 나의 꿈 또한 영원히 저 깊은 바닷속으로 잠기는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늙어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정신없이 고통스러운 육아의 순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다 아이의 잠자리 독서를 위해 육아서를 보며 하나둘씩 실행에 옮기던 날이었다. 육아서를 읽다 보니 나름 내가 육아를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쉽고 편하게 키우지 않다 보니 엄마인 나는 힘들었지만 아이는 밝게 웃으며 잘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내 꿈이 꺾여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대신 어차피 내 품에 끼고 아이를 키우자고 마음먹었으니 4년 동안 즐겁게 아이와 잘 지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3년 정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배우고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할 즈음 내 일을 시작하면 뭔가 새롭고 재미있지 않을까? 


어차피 나이가 있으니 지금 경력단절된 직업에 미련을 두지 말고 직장이 아닌 내 일을 찾고 배워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서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육아도 끝이 보였고 내 꿈을 위해 무얼 배우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행복했다. 즐거웠고 가슴이 뛰었다. 이제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위한 4년을 보내자고 마음을 먹었다. 


닥치는 대로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고 하루종일 아이와 놀고 책을 읽고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했다. 집청소도 아이보다는 뒤로 미뤘고 거창한 요리보다 간단하고 편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에게 보이는 육아를 위해 신경 쓰지 말고 나와 아이만 즐겁게 지내보자고 마음먹었다. 남편에게 집이 좀 어지러워도 식사가 좀 부족해도 3,4년만 이해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오히려 활기 넘치는 내 얼굴을 보고 그제야 밥다운 밥이 목으로 넘겨졌을 것 같다.

그날 일후로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산후 우울증인줄도 모르고 지내던 내가 나를 돌아보고 이해했던 그날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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