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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Sep 08. 2024

마흔의 체력으로 시작 된 육아.

체력을 가불 받아 썼다.


나이 마흔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며 아이를 낳는 날까지도 왜 아이를 일찍 낳으라고 하는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수유하고 기저귀 갈고 딸랑이 들고 놀아주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 그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나도 기어 다니고 있었으니까. 친정과 시댁 다 멀리 있으니 아이 맡기고 어딜 가본 적이 없다. 운동은커녕 따뜻한 국에 반찬 세 가지 차려놓고 천천히 맛난 점심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큰 사치였다.


남편이 점심시간이라 밥 먹으러 간다고 카톡이 오면 '아~부럽다.' 속으로는 이 마음이 들었지만 퇴근하고 와서 천기저귀 빨고 쓰레기 버리고 청소하는 남편이 불쌍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기어 다니는 아이를 빨래 바구니에 넣고 노끈으로 긴 줄을 만들어 이방 저 방 열심히 끌고 다녀본들 시간은 고작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애는 보는 게 아니라 놀아주는 거



나라는 사람은 참 애를 못 본다. 아니 애를 가만히 보기만 잘한다.


세상에서 아기랑 놀아주는 게 제일 힘들다. 강아지를 키울 때도 그랬다. 장난감 가지고 놀아주는 게 힘들어서 오히려 산책을 데리고 나갔다. 그냥 내달리면 되니까.


아이도 똑같이 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아주는 데는 시간이 고작해야 20분 흐르니 걸음마를 떼기 전엔 유모차에 태우고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아기 엄마들은 조리원에서 만난 모임이라고 카페에서 만나 차도 마시고 육아템 공유도 하던데...

나는 자발적 왕따로 지내기로 했다. 아이 얼러가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커피잔을 들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일 자신이 없었다.  '하하하. 호호호.' 이미지 관리해 가며 다른 엄마들에게 눈웃음을 보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걸었다.






아침에 아기가 눈을 뜨면 기저귀 갈고 수유하고 유모차에 태워 무조건 걸었다.


아파트 옆 작은 개천이 흐르는 산책로를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와 단둘이서 걸었다. 아이랑 말을 하지 않으면 신랑이 집에 오기 전까지 한마디도 못하니 산후 우울증이 생겼겠지.


매일 아침 산책길을 걷다 보니 왕복 한 시간 반을 아이에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와~ 하늘이 파랗다. 제인아 저기 머리 위에 보이는 파란 게 하늘이야 그 옆에 둥둥 떠가는 게 구름이고"


"비가 오면 저 하얀 구름이 회색으로 변해. 그럼 저 위에서 물이 떨어져. 신기하겠지?"


"옆에 봐봐. 초록색 나무야. 봄엔 저기에 분홍색 꽃이라는 게 생겨. 지금은 여름이니까 조금 있으면 이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변해. 그게 가을이야. 그러다가 추운 겨울이 오면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하늘에서 하얗고 차가운 눈이라는 게 내려"




애처롭다.



뭔지도 모를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라곤 아이뿐이니 아이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건다.


그래도 나는 믿음이 있었다. 아이 눈을 보면 왠지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고 내 마음도 다 아는 것 같았다. 산책하며 말을 건네다가 잠시 벤치 앞에 유모차를 세우고 앉아서 아이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엄마. 이게 세상이에요? 밖은 너무 신기해요. 소리도 막 들리고 얼굴도 뜨거워지고 엄마가 말한 하늘을 보려는데 눈이 잘 안 떠져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육아는 그거였다. 몸을 덜 쓰고 말로 세상을 알려주고 산책하며 손으로 나무, 돌, 꽃을 만지게 해 주는 거. 아이에게 노래 부르며 어르고 비행기 태워주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으니까.



뜻밖의 영재



하도 말을 걸어서 그런가? 아이가 옹알이도 빠르고 그림책을 보며 내가 불러주는 동물도 곧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색깔도 잘 짚어낸다.


오전에 한번, 낮잠 자기 전 한번, 저녁 아빠 마중 나가는 길에 한번. 하루 세 번의 산책을 하고 집에서 기어 다닐 때면 내 마흔의 체력은 땅속 지하세계로 내려가 있었다.


힘들어서 소파에 기대고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가 기어 와서 그림책을 한참 쳐다본다. 그때 번뜩 내 뒤통수를 '탁'하고 치고 간생각.


'이런~ 이거 제일 쉬운 육아잖아?'


너로 정했어. 마흔의 육아는 체력 빼고 책으로!





실감 나는 책 읽기는 내가 또 자신 있지. 토끼처럼 귀여운 목소리로, 곰 같은 느린 저음으로, 여우 같은 간사함은 서비스다.


"육아요? 책 읽기가 제일 쉬웠어요. 호호홍"


그렇게 내 책육아는 마흔의 체력을 극복하지 못해 생겨난 고육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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