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며칠 전 "무지크 바움"이라는 곳에 갔다. 3호선 신사역에서 가깝다. 클래식 음악과 예술 동호인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 중인 "임야비"가 강연을 했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의대를 나온 전문의인 탓이다. 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제목은 "유리알 유희-총체 예술에 관하여" 시리즈였다.
제목이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꽤 흥미롭다. 헤르만 헤세의 책 제목인 "유리알 유희"로 시작해서 서양의 문학과 고전 음악, 무용, 그림, 철학, 과학이 총출동한다. 볼테르, 베토벤, 라벨, 고야, 카프카, 바타이유 그리고 나중에는 칼 세이건과 그의 아내까지 나온다. 무슨 짬뽕인가 싶기도 하지만, 강의를 듣다 보면 날줄과 씨줄이 엮여 이들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강연자의 솜씨에 무릎을 치게 된다. 듣고 나면 뭔가 지적으로 고양된 듯한 느낌도 차오른다.
임야비는 강의 중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나 역시 그날 접한 2악장이 참으로 좋아 주말 내내 다시 듣고 있다. 제목을 도발적으로 "40세 이하 청취 금지"라고 쓴 것은 이유가 있다. 인생을 이야기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32번이 끝이다. 즉,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소나타인 것이다. 그의 삶도 저물고 있었고, 이미 청각은 완전히 사라져 고통과 암흑 속에서 몸부림칠 때 이기도 했다.
내 생각에 감히 이 곡에는 베토벤이 생각한 한 인간의 생애와 우주가 다 들어있다. 더 이상 보탤 게 없는 완벽 그 자체고 그만큼 시간과 현실을 초월하는 음악이다. 32번은 2악장 형식이다. 1악장은 운명과 투쟁의 음악이다. 어찌 보면 베토벤스러운 익숙함이 느껴진다. 놀라운 것은 2악장이다. 아리에타(Arietta)라고 한다.
리클라이너 의자에 누워 앉아 "예브게니 키신"의 라이브 연주를 튼다. 오디오 볼륨을 서서히 올린다. 위압적으로 시작되는 1악장은 쉴새 없이 몰아치다 끝나고, 어느새 2악장이 조용히 내면의 세계로 안내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오래된 앨범을 들추어내듯 펼쳐진다. 아내를 처음 만난 때, 아이들과 놀며 웃던 때, 술 한잔 걸치고 낄낄대며 떠들던 자리가 생각난다. 2악장 후반으로 가면 오른손 트릴이 무한반복되는데, 이로 인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공간이 창조된다. 연주는 계속되지만 역설적으로 곡은 침묵을 향하여 간다.
내 인생이 산산조각 나던 때가 불현듯 고개를 든다.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바닥이었던 때,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채,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던 때가 말을 걸어온다. 음악을 들으며 그랬다. 변주가 계속될수록 음악은 가벼워지고, 나는 중력을 거슬러 부양하는 느낌이 든다. 지상에서 벗어나 초월하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빛이 보인다..." 이어령이 임종 때 했다는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는 눈물 한 방울.
32번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형식 측면에서 2악장으로 끝난다. 소나타는 통상적으로 3악장이다. 빠른 1악장, 느린 2악장 그리고 활기찬 3악장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했던 이는 악보를 받고도 3악장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미뤘다고 한다. 그만큼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 2악장은 변주곡이다. 시간, 리듬,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혁신이었다. 1822년작이니 200년이 넘은 곡인데, 재즈스럽기까지 하다. 20세기 재즈 뮤지션이었던 빌 에반스는 32번의 리듬과 변주를 극찬했다.
피아니스트라면 한번쯤 32번 레코딩이나 연주를 꿈꾸게 된다. 대가 중에는 프리드리히 굴다, 예브게니 키신, 우치다 미츠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다니엘 바렌보임, 안드라스 쉬프 등의 명 연주들이 있다. 나는 키신의 실황연주가 좋다. 굴다의 2악장은 너무 급하고 빠르다.
그러나 내가 최고로 치는 것은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 2명의 실황 연주다. 먼저 임윤찬의 스승인 손민수의 실황 연주다. 보고 또 봐도, 듣고 또 들어도 좋다. 마음 깊숙한 곳을 터치하는 명연주다. 또 다른 백미는 백건우다.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불리는 노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의 마지막날이다.팔순이 가까운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마치고 나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일청을 강력히 권해본다. 물론 나이와 관계없이 고루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제목처럼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면 더욱 깊게 교감할 것이라 본다.
Wow~ Good Review, Inspiring.
글을 읽고 연주를 들으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32번이 우리 인생같네요. 1악장은 찬란했던 10-30대, 2악장은 40대 이후에 인생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여유를 찾아가는..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 일요일 아침에 덕분에 좋은 선물 받았습니다.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