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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존재를 내 편으로 만드는 시간, 해외출장

상사와 떠나는 해외출장 필살기 (마지막 회)

by 스티뷴

마지막 편이다.


제목을 "상사와 떠나는 해외출장 필살기"로 명명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상사라는 특별한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 모든 직장인들의 고충에 있어 주요 원인 제공자인 상사, 동시에 모순되게도 내가 올라가고 싶은 그 자리, 상사말이다. 최근 에미상 수상으로 다시 한번 화제가 된 ‘오징어 게임’에서는 여든이 가까운 노배우 오영수의 역할이 컸다. 그는 사는 게 재미없어져 버린, ‘늙고 병들고 힘없는 노인’ 참가자였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회에 그가 오징어 게임의 설계와 운영에 있어 CEO나 다름없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처럼 상사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이 다가 아니며, 원투 펀치가 있는 이들이다. 나에게 의미있는 수준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치명적인 존재라는 점을 잊지 말자. 그 점에서 한편으로는 상사와의 출장은 당신에게 기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신이 출장자로 선정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인정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상사와의 해외출장을 회사에서 아무나 보내지는 않는다.

상사는 내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다. 지지고 볶다가도 결국은 화해한다. 그러나 상사와 한번 생긴 불화는 오래도록 치유가 어렵다. 지금 현재 당신의 상사가 지긋지긋한가?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그에게도 굿바이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그때까지의 긴 겨울을 버텨야 한다. 그 겨울은 생각보다 혹독하다. 그러니 쉽지 않겠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사실 가능하다면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


평판(reputation)"에 대하여 들어보았을 것이다. 조직 내에서 나에 대한 평판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번 나왔다가 사라지는 루머와 달리 실체가 있다. 과거의 내 실적, 업무수행 태도, 타인의 나에 대한 평가 등이 종합세트로 평판을 형성한다. 평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된다. 그것은 내 직장생활 전 기간을 통하여 쌓아 올린 신용점수와도 같은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나의 직장 내 위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평판의 위력은 크다. 평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이가 바로 상사이다.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상사는 단 한 번의 피드백으로도 내 커리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다. 상사와 필리핀 마닐라에 출장을 갔다. 당시 나는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전공에 대하여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이 있었다. 미국 로스쿨에 가서 미국 학생들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 취득하는 JD(Juris Doctor) 학위과정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의 동료들과 선배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하나같이 날씨 좋은 곳에 가서 가족들과 추억이나 만들지 괜히 공부할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날씨 좋은 LA에 있는 괜찮은 대학교의 다른 학과에서는 고맙게도 나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시한 터였다.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사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도중에 내 고민에 대한 의견은 어떤지 꺼내보았다.


상사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아니 그걸 뭘 고민해. 당연히 로스쿨로 가야지.

상사는 그 이유에 대하여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후 정말로 로스쿨로 진로를 정했다. 물론 상사의 조언만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막상 미국에 가서는 후회막급한 시간들이 있었다. 공부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로스쿨의 치열한 강의실 한 가운데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외국인이 와서 앉아있다고 생각해보면 공감이 될 것이다. 그들과 똑같이 성적 경쟁을 하면서 말이다. 밤12시가 다되어 법대 도서관 경비가 문 닫을 시간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주섬주섬 챙겨 나올 때는 유난히 맑은 미국의 밤하늘을 보며 문득 서럽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러나 고생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JD라는 특별한 학위와 미국 변호사라는 전문성을 선사해 준 시간이었다. 내게 조언을 해준 그 상사는 훗날 장관까지 올랐다.




다음으로 해외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출장자들이 잘 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methodology)을 살펴보려고 했다. 그 방법론을 풀어쓴 것이 "필살기"다.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암묵지와 형식지다. 노나카 이쿠지로 일본 호쿠리쿠 국립대 교수의 분류다.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는 '숨겨진 지식'이다. '학습과 체험을 통해 개인에게 습득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지식'을 말한다. 머릿속에만 있는 지식으로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지식이다. 또한 암묵지는 시행착오와 같은 경험을 통해 체득하기 마련이다. 반복된 해외 출장과 의전으로 내 몸에 체화된 지식이 대표적인 암묵지라고 하겠다.


반대로 형식지(形式知, Explicit Knowledge)는 '겉으로 드러나는 지식'이다. '매뉴얼처럼 문자화되어 외부로 드러나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암묵지와 형식지 중 어떤 것이 더 부가가치가 높을까? 당연히 암묵지다. 머릿속에 있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지식이니까 말이다.


연재하면서, 내 "암묵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려 애썼고, 그것을 이곳 브런치에 최대한 "형식지"로 남겨보려고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거액의 원조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 효과는 지리멸렬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계속해서 고기를 잡아다만 주는 선진국들의 행태가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고기를 낚는 법을 알려주어야 알아서 먹고 살 텐데, 정작 원조를 받는 이들은 배우려는 의지나 실행력이 없다. 원조를 제공하는 측도 고기 낚는 법을 굳이 가르쳐 주려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내게 그간 출장의 결과로 남아있는 형식지들은 당장은 읽는 이들에게 아하! 할 수도 있겠으나 긴 관점에서는 연재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장 핸드북 등은 내용상 공유하기에 부적절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출장 목적에 딱 들어맞는 공통분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모두가 한번쯤 고민해야 할 상사와 나의 "관계" 그리고 출장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하여 기술하려고 했다. 바로 이것이 '고기를 낚는 법'이고, '암묵지의 형식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필살기'라는 시리즈로 연재했다.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이해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이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버릴 것처럼 아우성이다.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단순 노동은 이제 로봇과 테크가 대체하는 세상이 왔으니 '대체 불가능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처세술 강연이나 책에서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것은, 표현만큼은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그 실체는 직장이라는 조직 내에서는 허구다. 단언컨대 그런 것은 없다. 회사라는 거대한 동력장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조직은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스템의 작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장 출장 직전에 다른 상사로 출장자가 바뀐다고 해도, 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의전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출장 자체가 펑크나는 것은 아닌 이치와 같다.


홈런이 아닌 번트라도 대겠다는 생각으로 공을 본다면 '대체 불가능한 나'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체 불가능성'의 완화된 형태는 여전히 당신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차별화된 능력'은 직장 내 성공의 중요한 열쇠이다. 강조하지만 태도가 중요하다. 상사와의 해외출장을 억지로 끝내야만 하는 "숙제"로 생각하지 말고, “영업"이자 "비즈니스"라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상사와의 출장은 직장이라는 타이트한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작은 세상"이다.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놀이터라는 것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출장 준비과정에서, 또 현지에서 분명 또다른 복병을 만나고 좌충우돌이 있을 것이다. 출장 때 저지른 얼굴화끈한 실수는 두고두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들이 축적되어 때로는 내세울만한 쾌거를, 또 작은 성공들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준비과정과 좌충우돌 속에서 당신만의 경험이 쌓일 것이고 그것은 당신만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을 때 당신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의 사소한 글들이 읽는 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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