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와 떠나는 해외출장 필살기 (10)
"트립 투 그리스(Trip to Greece)"란 영화가 있다. 메가폰은 마이클 윈터바텀이 잡고, 영국의 두 코미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나온다. 영화는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두 배우가 그리스를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며 쉬지 않고 떠드는 것.
그렇다. 식도락(食道樂)이란 말이 있다. 여행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는 좋은 식당에서 내 미각을 깨워주는 식사를 하는 것이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훌륭한 한 끼 식사로 말끔히 없어지는 마법을 종종 보았다. 테이블을 밝게 비추는 조명이 인상적인 대문 사진 속의 장소는 런던의 Greenwich Naval College안에 있는 Painted Hall이라는 곳이다. 행사 주최 측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저녁 만찬을 '갈라 디너'라고 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들의 성격에 대하여 'reserved'하다고 표현한다. '차도남스러운' 혹은 '까칠한' 정도로 번역하면 딱일 것만 같다. 그들은 미국인들과 달리 단숨에 친해지지 않는다. 런던 연차총회의 피날레였던 이날의 갈라 디너는 차도남인줄로만 알았던 영국 동료들의 숨겨놓은 초식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시간, 단체로 올라탄 버스들은 화려한 템즈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행사장에 들어가자 모두가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규모와 화려함에 압도당해버렸다. 이미 백기투항한 우리들을 향해 그들의 초식은 계속 펼쳐졌다. 영국 친구들은 식도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것이 불과 십 년을 갓 넘었다. tripadvisor와 google 앱은 출장 가는 이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다. 과거에는 여행책자와 지도를 들고 다니며 어렵사리 한 끼를 해결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이제 식당을 직접 다녀온 여행자들이 앱에 리뷰를 쓰고 평점을 남겨서 고스란히 순위로 반영되고, 사진과 메뉴, 가격 정보까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된다. 고마울 수밖에 없다. 이동 중에도 앱을 켜면 근처에 어느 식당이 가장 평이 좋은지 확인할 수도 있다.
동선을 꼼꼼히 체크해서 언제 어느 식당에 갈 것인지 미리 정할 것을 추천한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훌륭한 식당이나 인기 만점인 식당이라면 당연히 예약을 해놓아야 한다. 펑크가 나도 취소하면 그만이다. 또한 언제 방문할지는 현지 사정에 따라 바뀔 수도 있지만, 어느 식당에 갈지는 미리 머릿속에 계획이 있어야 한다. 한국식당을 미리 검색해 놓는 것도 중요하다. 해외에서의 식사메뉴는 이탈리안, 프렌치가 가장 실패의 확률이 낮다.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라면 모르겠으나, 아니라면 고기보다는 생선이 좀 더 안전한 선택이다. 독일 출장을 갔을 때 메뉴 중에 "Made in Germany"가 있어서 야심 차게 주문했다. 실제로 받은 것은 처음 먹어보는 독일식 모둠 수육이었다. 통나무집 같은 목조 레스토랑에 앉아 있으니, 에일 맥주만 있으면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을 찍어도 될 듯한 비주얼이었다. 냄새도 생소했지만 사슴고기까지 나오는 데 한두 점 먹었더니 도저히 손이 가지를 않았다.
코스 식사에 대한 이해와 식사 예절은 기본 에티켓이다. '좌빵 우물'에서 벗어나 좀 더 세련된 테이블 매너를 스스로 갖출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와인 지식 그리고 생선이름 정도는 공부하자. Sea Bass(농어), Cod(대구), Halibut(광어), Sea Bream(도미) 등 도대체 뭔 생선인지는 알아야 주문할 수 있다. 메뉴판을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싶으면(가끔 프렌치 식당 등이 그렇다) 웨이터에게 추천해달라고 하는 것도 좋다. 주문 말미에는 와인이나 맥주 한잔을 청해보자. 술을 평소에 안 마시는 상사도 한잔 정도는 마신다.
서구에서 웨이터를 손을 들어 부르는 것은 참으로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파리 개선문 앞의 유명 레스토랑은 이제 우리 같은 동양인들이 주 고객이 되어 버린지가 오래라서 손을 흔들며 불러도 웨이터가 반갑게 온다. 그러나 통상 유럽에서는 웨이터들의 자존심이 대단하다. 앉아 있으면 알아서 테이블에 오기 마련이며, 안 온다 싶으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웨이터와 눈을 마주치면 된다. 초보시절에 유럽의 유명 카페에 가서 우리나라 식으로 excuse me! 를 소리 높여 외친 적이 있다. 웨이터가 못 들은 척을 하고, 다른 손님들이 인상을 쓰길래 왜 그런가 했는데, 부끄러운 기억이다.
현지 음식을 한 번쯤 먹어보는 시도도 꼭 해볼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방문하는 곳은 대부분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웬만한 로컬 음식도 여행객에 맞게 살짝 변형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선진국이나 동남아 등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아프리카에 가서 로컬 찾으면 안 된다. 호텔에서 웨스턴식으로 식사하는 것이 현명하다.
좀 길다 싶은 출장은 한 끼 정도는 우리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았다. 무조건 한식만 먹어야 된다는 상사가 있으면 괜한 서양식 찾지 말고, 한식당을 가고 없으면 중식당을 가라. 해외 특히 서양에서의 스시는 대개가 한심하다. 캘리포니아 롤 정도는 오케이지만 그 외 사시미 등은 아예 시도하지 말자.
인도 뭄바이에 출장을 갔다. 뭄바이는 시내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귀국 편을 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도시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불결하고, 도로는 어느 도시보다도 체증이 심하다. 거지도 많고, 불쾌한 냄새와 매연이 가득하다. 며칠 있는 동안 나는 '판메이'라는 이름의 현지 직원과 친해졌다. 같이 간 내 상사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교동 뒷골목 노포에서의 저녁을 좋아했다. 판메이는 우리를 '을지로 골뱅이집' 같은 곳에 데리고 가서는 인도 샐러리맨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여주었다. 누가 인도 사람들은 술을 안 마신다고 했나? 로컬 킹피셔(Kingfisher) 라거맥주를 잔뜩 쌓아놓고, 담배를 피워대며 땅콩을 안주 삼아 들이붓고 있었다. 이 친구,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는 나에게 가보고 싶은 식당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상사와 리얼리티 트래블을 연장해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나오는 카레 말고 뭄바이 사람들이 사 먹는 진짜 카레식당이 있을까?
판메이는 의미삼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텔을 나와 여기저기 막히는 길을 헤집고 몇십 분을 갔을까. 'Soam'이라는 식당에 택시가 섰다.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깔끔했다. 여기서 맛본 카레는 내 인생 최고였다. 내가 아는 치킨 마살라나 시금치 카레가 아닌 전혀 다른 카레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식당에서 알았다. 생각지도 않게 우리들의 입은 무척이나 호강했다. 뭄바이라는 도시의 여행지로서의 가치를 새삼 확인한 계기였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갔을 때는 Alvear Palace 호텔에서 묵었다. 부티크 호텔이자 회의장이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환율을 고려하면 아주 비싼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조찬을 하는 식당의 풍경이 예술이다. 평화로운 풍경에서 함께하는 커피 한잔이 전날의 피곤을 잊게 해주었다.
두 군데 모두 식도락이라는 단어에 정확히 부합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
그만큼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영화 트립 투 그리스에서 두 수다스러운 배우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갔던 식당들과 플레이트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특별한 식사를 통해 식도락을 경험하고 멋진 추억을 만드는 기회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