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과 외공
중고교 시절에 무협지를 밥보다 더 좋아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장풍을 쏴 대고, 검화를 그리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청소년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영웅문 시리즈는 지금도 가끔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 좋아하던 장르의 소설이 판타지 쪽으로 진화한 지금은 나름 그리운 맛이 있어서 가끔 보고 있긴 하나, 옛날의 그 맛(라떼 시절의 칙칙하던 책, 세로로 쓰여진 무협지,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보던 맛 등등)은 절대 나지 않는다.
무협지에 흔하게 나오는 용어인 `내공`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통용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변형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래의 뜻은 `오랜 기간 경험을 통해 쌓은 능력`이다. 무협지에서는 외공과 대비되는 말로 주로 사용되는데,
내공은 내적인 능력/공력(단전 등에 길러진 신체 내부의 힘, 기의 일종)을 지칭하고,
외공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의미한다.
내공이 강한 사람은 외모도 단아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선비 같은 스타일이며,
외공이 강한 사람은 우락부락 근육에 외모 자체가 장비 스타일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협지에서는 외공이 강한 사람보다는 내공이 강한 사람이 훨씬 강한 편이다. 리더 혹은 최절정 고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내공이 강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직원들을 선발하고, 평가하고, 이에 따라 승진도 시키는 등의 인사업무의 일을 주업으로 30여년 살다 보니 회사 임직원들도 내공과 외공이 강한 분들이 보인다.
특히 면접과정에서 보면 후보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외공 위주로 과시할 수 밖에 없다. 약간 맛만 본 것으로 전 과정 모두 전담했다고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곁눈질로만 본 업무에 대해서도 직접 다 해보았기에 자신 있다고 하는 분도 많다. 실 사례로 이러한 분이 정말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2~3개월만에 재이직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사실 내공이 약한 분들은 전문가(혹은 직장생활 15년 이상)가 몇 마디만 물어보면 다 나온다. 특히 인사 경력 20년 이상 정도 되면, 후보자 분들의 이력서를 미리 검토하고, 이 분들이 자기소개 하시는 내용과 태도만 봐도 어느 정도의 감이 오게 된다. 너무 과시하게 되면 오히려 면접 결과가 더 안 좋게 나오게 되니 혹시라도 면접을 앞두신 분이 있으면 유의하시기 바란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전통의 속담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세상에 인생의 고수가 이리 많은 줄 모르다가, 이제 인생의 여러 풍파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고수도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니 자연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젊음의 패기가 왕성할 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어 대는 것이 순리와 이치에 맞을 것인데, 그 한계를 몰라야 더 과감하게 부딪히고, 더 도전하고,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연식이 쌓여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단순함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존경하는 법정 스님도 무소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무소유의 의미는 단순한 삶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인생에서의 단순함은 단순하게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단순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공이 쌓인 이후의 단순함이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하신 분들로 미국의 대법관이었던 올리버 웬들 홈스는 "나는 복잡성 이전의 단순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지만, 복잡성을 넘어선 단순성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라고 했다고 하며,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단순함은 고도의 정교함이다" (이상 `해피어, 탈 벤-샤하르 지음)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도의 정교한 단순함`이 그렇게 쉽고 단순한 의미는 아닌 것이며, 내공이 탄탄하게 쌓인 이후의 복잡성을 초월한 이후에야 가능한 단순함인 것이다. 그저 살림살이 다 팔아 치워 내는 단순함은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함의 시작 단계 정도는 될 것이다.
인생의 쓴맛, 단맛, 짠맛, 신맛 등등 모두 맛을 보고, 자기 성찰과 함께 진지한 고민을 거친 연후에야 단순한 해답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업무에 대한 내공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조직속에서
이런 저런 업무를 하면서
갈등을 겪고, 부딪히고, 해결하고, 싸우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혼나 보고 등등의 매운맛 단맛 쓴 맛 등등을 겪어야만 쌓이게 된다.
내공을 빨리 쌓기 위해 무협지에서는 내단, 영약 등을 복용하곤 하는데,
현실 세상 및 회사에서는 지름길이 없다.
대충 겪은 정도의 외공만을 가지고 과시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는데, 10년 혹은 길어야 15년이면 그 허접한 내공이 드러나게 되어 직장인으로서는 조기에 퇴출되는 결과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직장인이라는 것만이 엄청 성공한 길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분들이 다른 잘하시는 길을 찾아서 훨씬 더 성공한 분도 많이 있었다.)
인생의 내공을 성실하게 쌓아가시는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