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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나 Oct 28. 2020

악플이 아픈 이유

사적인 몸이 공적인 가상공간에 배설하는 말들

악플은 왜 그다지도 큰 상처를 입히고 극단적인 경우 한 사람을 자살로까지 내모는가.


나름의 가설이니 참고만 하되, 좀 그럴 듯 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특히 행위자 입장에서 조금만 조심하면 좋겠다. 이 글은 악플러들을 비난하고 책망하기 위함도 아니고, 피해자들을 옹호하고 연민하는 글도 아니다. 왜 인터넷 상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에 관한 가벼운 고찰이라고만 해두자.


'악플'의 정의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것부터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사실, '악플'을 정의할 때 무 자르듯 뚜렷한 기준을 세울 수는 없다. 말이 향하는 타겟이 되는 사람 입장에서 불쾌하고 모욕감을 느낀다면 어떤 말이든 악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자의 입장에서 보면 악플은, 악플이기 이전에 주관적 생각, 감정, 판단, 평가, 추측 따위들이다.


그러니까 행위자가 본인 생각, 감정, 판단, 평가, 추측을 내뱉는 말들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악플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런 과정이 행해지는 풍경을 잠시 상상해보자. 행위자는 보통 사적인 공간(집)에 존재한다. 공적인 공간에 있더라도, 개인 스마트폰이나 PC를 사용하고 있기에 사적인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몸은 기본적으로 '무장해제'된다.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지켜야할 에티켓도, 옷매무새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자세는 늘어지고 트림이나 방귀같은 생리현상도 마음껏 배설한다. 혼자 있을 때 소리 안나게 방귀끼려고 엉덩이 각도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굳이 생리적 현상의 배설 얘기를 꺼낸 것은, 이 사적인 공간에 있는 몸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서 그렇다. 이는 감정과 생각에도 적용이 되는데, 혼잣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가 내뱉는 혼잣말은 타인을 배려할 필요가 없기에 원초적이고 거칠고 때론 잔인하다. 혼잣말로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내뱉는다'는 것은 '표현'이라기보다는 '배설'에 가깝다. '표현'의 사전적 정의는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이다. 형상이라는 것은 상징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염두하고 있다. 원초적 재료가 바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고려한 형상으로 바뀌는 '상징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로 표현이다. 배설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원재료가 바로 튀어 나온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적인 공간이라는 맥락에 처한 몸들은 일종의 '배설'모드에 있다. 그런 사적인 몸들이 공적인 가상공간인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될 정도로 너무나도 쉬워졌다. 사적인 몸이 쏟아내는 말들이 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실시간으로 공적인 공간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바야흐로 초연결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익명성이 보장되는(물론 고소를 당하기 전까지만) 인터넷공간은 배설 욕구를 마음껏 발산해버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좌절과 분노도 어만 곳에 풀기에 정말 제격인 공간이다. 사적인 배설들이 아무런 제지나 검열없이 공적 공간에 투척된다.


그럼 이제 반대편 상황을 그려보자. 그 말을 보고 있는 당사자는 위에 설명한 사실들을 머리로는 알아도, 아프다.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진화된 우리의 본능에서 찾고 싶다. 


현대인들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온 원시시대 때의 몸으로 최첨단 시대를 살아간다. 비유하자면 양복입은 유인원 정도랄까. 우리가 상황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느끼는 방식은 수렵채집 시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여전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즉, 과거 마을 단위로 군집생활을 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당시 150명 남짓이 공동생활하는 군집에서 내 뒷담화가 퍼지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이었을 것이고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나 욕설등을 접하고도 별 고통없이 무덤덤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후세에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남들의 뒷담화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해명을 하거나 경우에 따라 본인 행동을 수정하려 노력했을 수 있기에 생존확률을 높이고 후세에 자손을 더 많이 남겼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조상들의 후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원시적) 뇌가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불특정다수의 말과, 생존과 직결되었었던 마을 사람들의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화 과정에서 인터넷은 없지 않았나. 그래서 배설된 인터넷 상의 원초적 말들을 접할 때, 생존과 직결되었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뒷담화를 들었을 때 느꼈던 고통과 거의 똑같이 느낀다. 군집생활을 할 때는 많아봤자 150명에 그쳤겠지만 지금은 150만명의 비난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자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쯤에서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악플의 화자와 청자 각자에게 간곡히 부탁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말하는 사람아. 

당신 몸은 사적인 공간에 있지만, 당신 말은 공적인 공간으로 뻣어나간다네. 공적 공간은 배설이 아니라 표현이 요구되는 곳이라오.


듣는 사람아. 

당신이 아픈 건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네. 당신 뇌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그런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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