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의 안녕하지 못한 하루

회사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른이의 넋두리

by 흔한여신
작년엔 회사에서 업무용 수첩(다이어리)을 나눠주지 않았다.


사실 아예 안 준건 아니고 다른 뭔가를 주긴 줬다. 하지만 예산이 빠듯하다며 속지만 배부했다. 전년도에 썼던 겉껍데기에 속지를 갈아 끼워서 쓰라고 했다. 물론 회의 할 일이 많지도 않고 출장 갈 일도 많지 않아 쓰임새가 적었다지만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직원들끼리 속지를 두고 이야기 할 때 '별 쓸모도 없는 다이어리였지만 더욱 쓸 일이 없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더 웃픈 사실은 작년에 입사한 신규직원들은 입사 선물(?)로 속지만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겉껍데기 생김새를 구경조차 못 해본 채로 속지만 챙겨야 했다. 6공 다이어리를 따로 구입해야 쓸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사정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로 물품이 보급되다니 참 안일한 결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소수의 관리자에게만 새로운 겉껍데기가 배부되었다. 회사 주머니 사정이 빠듯할 땐 원래 신입들이 제일 서러워지는 법이다.


출처 http://getabout.hanatour.com/archives/815480


올해엔 겉껍질이 있는 다이어리를 나눠줬다.


작년에 속지만 받았던 전력이 있어 이제 앞으로 껍데기는 주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예상을 깨고 다이어리가 배부되었다. 이전에는 블루 계열의 색이었는데 흙색으로 바뀌었다. 썩 맘에 들지 않는 디자인이지만 완제품이 왔으니 군말할 이유는 없었다. 올해도 이면지 뒷면을 메모장으로 삼을 거라 아마 별 쓸모가 없을 예정이다.


한 때 회사에서 지급하는 다이어리가 소속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때였다. 별 거 아닌 다이어리가 잠시나마 내가 이 곳에 소속된 근로자였다는 증거물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런 작은 소모품에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지겨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구나 하고 조용히 읊조릴 뿐.


오늘도 많은 공시생들이 그리고 취업준비생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전동열차와 버스에 담긴 직장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볼품없는 트레이닝복 대신 정장차림으로 출근하는 게 꿈인 사람들은 지금의 변변찮은 내 자리라도 꿈에 그리고 있을테다. 한 때 나도 그랬으니깐. 그런데 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던 건 정말 상대적 입장차가 만든 환상이었다. 발 들이고 나면 그 모든 신기루가 사라져버린다. 인생의 쓴맛은 하나의 시험대를 통과하고 나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풍성한 열매들, photo by. Jundori


작년 연말엔 상이 풍년이었다.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기를 끌어 올리겠다는 명목으로 '표창장' 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주어졌다. 보통 일반 기업들은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지만 공무원에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런 회사가 유일하게 베풀 수 있는 미덕은 상장을 수여하는 일이었다. 상장에 딸린 상금은 없다. 혹시 서운한 사람이 생길까봐 특별히 수여 인원까지 유례없이 늘렸다. 내부에선 이 정도 시상 규모에 못 받으면 바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해진 인원 탓에 상의 주인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개중에는 입을 삐죽이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코로나 전파 우려로 인해 모든 행사가 취소된 만큼 상장 전수식도 약소하게 진행됐다. 덕분에 보는 눈도 별로 없었건만 앞으로 나가 상장을 받아오는 게 참 민망했다. 진정으로 축하 받을 자격이 충분해 자랑스럽다 여긴 게 아니었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회사생활 중에 처음 받은 상장이자 이십대에 받은 몇 안되는 상장임에도 크게 의미가 있진 않았다. 오히려 상과 인연이 닿지 않았던 19년도엔 받아보겠다고 아등바등했었는데 발버둥치지 않아도 쉽게 주어진 상에겐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들고 갈 거리가 생겼으니 부모님은 체면이 선다고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주변의 축하인사보다 절실한 건 회사의 관심과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품이 사회라지만, 직원들에겐 따뜻함이 좀 필요하다. 격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에게 기댈 수 있는 따뜻한 품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하지만 직원들의 고충엔 무심한 한편 외부의 지적엔 한없이 고개를 숙여 기대에 부응하겠다 말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다.


출처 http://www.min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8



오늘도 집에 가는 길에 친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희망 가득한 미래를 애써 머리 속에 그려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떠나는 게 답이 아니겠느냐는 자조 섞인 대화로 끝나버렸다. 그러곤 자기계발을 어떻게 하고 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회가 냉정하기에, 다들 비슷하게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기에 서러운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화제를 돌려보았지만 그럼에도 회사가 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간 회사가 구성원들의 안녕을
살피는 날이 올까?



미래엔 그런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추운 겨울이니깐 그런 미래를 꿈꾸기엔 너무 이른 거겠지.



출처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1702130110700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