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의 법칙 (1/2)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법

by 흔한여신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이면 으레 근황토크부터 시작해 직장생활 얘기로 수다꽃을 피운다. 특히 마음에 안 드는 직장동료에 대한 욕과 그 인간 때문에 서러워진 처지를 서로가 폭풍 공감하며 대동단결하게 된다. 도대체 그 못된 인간은 왜 그런단 말인가,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가. 하는 비난을 쏟아내며 서로의 고단한 사회생활을 위로한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역시 소위 말하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어디서나 들어맞는군.


일례로 한 친구는 회사에 같이 근무하는 여우같은 선배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선배는 한 마디로 자신은 돋보이길 원하면서 남은 함부로 깔아뭉개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사건건 남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거는데다가 항상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탓에 남들에게 은근히 분위기를 띄워줄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력이 빼어나거나 그 자체로 장점이 도드라지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매력있는척 하느라 진을 뺀다는 거다. 거기에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입장이 분명해서 아니다 싶은 자신의 책무는 과감히 남에게 토스해버리는 무책임한 태도까지, 들으면 들을수록 지적할 만한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여우짓을 남들은 모른척 눈 감아주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선배는 예상 외로 관리자급에겐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저만의 돋보이기 전략이 통한 까닭이다. 하지만 좋은 성과엔 본인이 반드시 끼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선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쏙 빠져버리는 얌체같은 사람이었다. 또한 제가 잘났다는 허영심에 눈이 멀어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등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지는 못할망정 선배들과 그 윗선에는 엘리트인냥 어필하는 모습이 영악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내 친구는 사무실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이 맡은 일에 종종 참견하는 그의 태도가 기분이 나빴지만 선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친구는 입사 동기 언니가 말썽이라고 했다. 동기인만큼 서로 의지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어렵고 귀찮은 일은 못하겠다고 대번 포기해버리는 데다가 일이 쌓여있는데도 마음껏 연차휴가를 사용하고 팀이 바쁜 중에도 제 일에 대한 책임감 없이 자리를 비우는 통에 내 친구는 함께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동기 언니는 자신의 일이 힘들다며 주변에 끊임없이 어필해 남들의 동정심을 산다고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관리자들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고 있는 탓에 그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고 내 친구는 본인의 고충을 내색하지 못한 채 참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억지로 손댈 필요도 없고 연간 주어진 개인의 휴가를 사용하는 것 또한 자유롭게 선택할 문제이지만 그런 자유분방한 선택으로 남이 고통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회사는 조직이고 조직엔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하기에 개인의 권리를 무한대로 주장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종종 구성원의 개인의사가 조직의 목표와 배치되거나 다른 조직 구성원의 이익을 해치는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물론 세상이 많이 바뀌었기에 최근엔 조직 구성원 개인의 의사를 좀더 중요시하는 게 옳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머지 구성원들과 조직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다.



침묵만이 답인걸까


나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좀더 뒤로 물리고 조직의 분위기와 목표에 나를 좀더 희생해 맞추는 것, 그것을 사회생활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가 그 동안 너무 개인이 '조직에 희생할 것'을 강요했던 탓에 육아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갑(甲)인 회사의 철저한 을(乙)로서 처절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현재엔 개인적 목표와 성취 역시 회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조직의 논리만이 우선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와 무관하게 때때로 포착되는 회사 내 진상들이 있다. 그들은 '라떼는 말이야'라며 과거 영웅담을 읊는 '꼰대'가 아니라 철저한 '마이웨이족' 들이다.



인과응보


친구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나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교적 성실한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개중에 쉬운 일만 골라서 하거나 이익 편취에만 관심이 있는 '월급루팡'들도 있고 일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걷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답답한 유형도 있었다. 그래도 내 경우는 친구들이 겪었던 진상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사실 내가 회사생활 중에 제일 짜증났던 건 누군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려는 분위기였다. 따끔하게 지적을 받고 더 책임감을 키워도 모자랄 판에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겠지 하는 식으로 어물쩡 넘기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성과가 저조한 사람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문책을 하기보다 그 사람이 해내지 못한 몫이 내게로 돌아오는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는 연공서열이 제일 합리적이라는 믿음 하에 성과로 줄세우기가 무의미한 공무원 조직에서 흔히 목격되는 형태다. 소위 공무원 조직에 관한 유명한 말처럼 '나도 안 잘리지만, 저 XX도 안 잘리기' 때문에 그저 묵과하는 수밖에 없다. 저 놈이 일을 제대로 하든 못하든 입사 순서에 따라 나보다 먼저 승진한다는 것이 정해진 시나리오다. 실제로 그 사람의 능력과 무관하게 모든 건 '순리에 맞게' 진행된다. 우리 조직에선 '억울하면 승진하라'는 말을 자주쓴다. 결국 내 개인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연차'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누군가의 자잘못을 따지는 일에 예민하게 굴었다. 정이 없고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하는 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논리에 따르면 돈을 더 받는 저놈이 더 책임지고 일을 많이 해야하는데 현실에선 그 반대다. 그렇다고 직급이 낮은 내가 하극상을 일으킬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어느 조직에서나 구성원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데 많은 잡음이 발생하곤 하지만 특히 정해진 기준에 따라 공로를 치하하는 사회에선 박탈감이 느껴지기 십상이다. 나는 그런데서 오는 불만을 종종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직장생활 초반엔 친구들끼리 모였을 땐 속상한 마음에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잘근잘근 씹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이토록 속상한데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회사 내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핑크빛 하늘, photo by. Rojoy


배경이미지 출처: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1701230110500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