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틈 없는 일개미의 슬프리만치 부지런한 삶에 대하여
사내 게시판에 어느 직원이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은 '일기'.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에 두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최근에 읽은 글 중에 가장 내 마음을 두드린 내용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로 과중한 업무량에 짓눌린 한 개인의 담담한 고백이, 그 절절한 심정이 눈물겹도록 슬프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조직에 몸 담아 온 선배의 휘청이는 마음과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는 깊은 고뇌를 느끼며 남일 같지 않다 여겨졌다.
두 달째 메스껍다. 뒤통수가 팽팽히 긴장된다. 식은땀이 난다. 손목은 서랍을 열 때도 아프다. 머리가 멍하다. 맘은 혼탁하다. 소용돌이치는 망망대해에서 배의 키를 놓친 것 같다. 다시 일어나 키를 잡을 기운이 없다. (중략)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나를 성숙시킬까. 이제 의문이 든다.
새벽 기도를 했다. 생존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지금 생존에 매여있다. 생계에 집착하고 있다. 나는 나를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 여겼다. 그래서 내가 참 맘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생존문제에 집착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내 입이 쓰레기를 쏟아낸다. 나를 아껴주는 친구에게 쓰레기를 쏟아붓는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죄만 짓고 사는 것 같다.
많은 내 동료 그리고 선후배들이 코로나 이후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됐다. 공무원이라고 다 같은 사정에 처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 주위의 대부분이 과중한 업무나 책임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예산 쓸 일도 많아진다. 개인에 대한 최소한의 생계지원 및 국가경제 회생을 위한 국가적 결단. 하지만 그 때문에 급증한 업무처리는 정책을 결정한 수뇌부가 아니라 말단의 직원들 몫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코로나 확산세가 꺾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거리두기 정책으로 신음하는 자영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부디 사태가 진정되어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쳐있는 내 동료와 선배들이 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임용되는 때에 나와 내 선배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 한 명의 봉사자로서 제 자신을 헌신하겠노라 결의를 다졌다. 비단 그런 결의가 없었을지라도 적어도 월급쟁이로서 제 밥값을 하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그게 집과 학교에서의, 사회에서의 변함없는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얼마나 주어지든 간에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과한 부담이 주어지더라도 해내는 게 나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다들 입은 삐죽이면서 제 할 일을 모른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에 매여 살다가 일에 쫓기는 신세가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언제나 쳇바퀴같은 일상 속에서 변함없이 해야할 일이 주어진다. 싫고 좋고의 선호 문제를 떠나 내 선배들이 그러하였듯 나 또한 내 할 도리를 다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곳에서의 삶은 외부의 부러운 시선이 말해주듯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만큼 고용불안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하지만 나와 내 선배들은 자신의 미래가 반드시 안락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진지 오래다. 국가가 나의 미래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 속에서 그저 밥벌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다. 오히려 '철밥통'이라는 환상은 남들이 가진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나는 수 없이 많은 현실을 목격한다.
대면하는 민원인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예의 하소연이 대부분이지만 귀 담아 들어야 할 제안들도 상당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이 나의 진심어린 호소가 위층으로 전달될 리는 없다. 조직이 수직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소통의 창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래서 같은 조직의 일부지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꼭 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일을 열심히, 그게 주어진 숙명이라 여기며 사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며.
한편 법령에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어 별 수 없이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사항은 거절해야 한다. 결국 죄송하다는 사과도 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 내 잘못이 아니라 제도가 잘못된거라 해도 사람들은 내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그런 사과에 익숙해진 지경이 되었지만 처음엔 무척 낯선 일이었다. 어느 선배는 내게 쓸데없이 죄송하단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 죄송하단 말을 남발한다. '안 된다'는 건 법이 그렇기 때문인데 그걸 설명할 땐 왠지 모르게 죄책감을 안고 있는것 같다.
일하다 보면 내 자신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가는 반면 채워지는 보람이나 즐거움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때면 과연 내가 얼마나 책임을 다 해야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열심히 사는 삶에 보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열심히 한 만큼 개인 성과에 차등이 있고 그에 따라 보상도 다르게 지급된다고 하는데, 그런 원칙이 이 조직사회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내겐 가장 불편한 대목이다. 한 때는 그래도 합리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구성원들의 노고가 제대로 치하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 느껴졌다. 열심히 한 자에게 주어져야 할 박수가 엄한 남의 몫이 되는 경우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제 일상마저 마비될 지경으로 넘치도록 책임을 떠맡아 고통스러워하는 선후배들을 볼 때마다 난 마음이 아프다. 불평불만에 대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꾸역꾸역 주어진 업무를 소화해 내는 그들이 안타깝다. 항변할 기회가 없는 '을'의 위치라는 게 서럽다. 그런 직원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수뇌부에 분노가 일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그저 하라는 대로 시키는대로, 내 본분에 충실할 뿐. 비단 공무원이라서가 아니라 한 직장인으로서 나는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다만 적당히 주어지지 않는 일을 적당히 해낼 뿐이다.
어제도 그러했듯 내일도 나는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보람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혹시 내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게 아닐까 아니면 해야할 것을 놓치고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며. 내일의 웃음을 책임지는 게 단순한 유머 한 마디가 아니라 일에 대한 기쁨과 보람이기를 바라며.
결국 언젠가 보람차다 느끼는 하루를 맞이하게 되길 간절히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