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찾은 평온한 일상
너 그거 알아? 서울 사람들은 훨씬 매정해
그것은 가스라이팅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한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심지어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근무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서울의 삭막한 분위기를 우려했다. 하지만 그들 중엔 서울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반복적인 가스라이팅에 당해 경기도 사람들이 더 살갑고 다정할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일도 많아 그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남을 챙겨주는 데도 인색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와 보니 정 반대였다. 지금 서울에서 만난 직장 동료들과 비교해 내가 겪은 경기도 사람들은 훨씬 더 매정했고 나의 고충에 무관심했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곁에서 위로가 되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고지도 없는 동네에 혼자 사는 동안 해가 뜬 순간부터 해가 진 저녁까지 나는 늘 혼자였다.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의지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지독히 외로운 시간이었다.
5년 반만에 서울로 왔다
이사를 하기 앞서 근무장소가 먼저 바뀌었다. 긴장한 채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았다. 나를 반기기는커녕 별 관심이 없거나 귀찮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만큼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꽤 오랜시간 가깝게 지내는 사람 없이 하고픈 말도 참으며 살아왔다 보니 사람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이번 인사이동도 처음엔 내게 의미가 크지 않았다. 그저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길 바랐다. 사실 사람들과 지내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경험이 많아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또 사람마다 날카로운 면이 있어서 괜한 호의를 베풀었다가 상처입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기우였다. 지금 나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환경과 행복한 순간을 맞았다.
관사에서 지냈던 2년간 외로웠고 때로는 시설이 불완전한 것 때문에 불편했지만 호소할 곳이 없었다. 감내하는 것은 내 몫이지만서도 우울감을 털어놓을 데가 없다는 게 굉장히 슬펐다. 애써 겉으로는 괜찮은듯 지냈고 글에서도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힘들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서울행이 결정되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것은 사실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기쁨의 환희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 함께 있는 사무실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다. 서울 사람들은 까칠하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이었다. 물론 업무 전환으로 인해 아직 배울 게 많아 더 챙겨주려는 것도 있겠으나 사소한 것도 불편하지 않을지 관심을 가져준다. 적당히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내게 다정한 관심을 보여준다.
몇 년만에 받는 환대인지 모르겠다.
좋은 일이 한 번은 오겠지 했는데 진짜였다
코로나가 발발했던 지난 2020년 이후 작년까지 나는 줄곧 어두운 터널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친구와 떨어져 지냈던 지난 2년은 마치 형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의 집은 부모님댁과도 가깝고 회사와도 가깝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각각 20분이나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언제든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다. 안산에 살았을 때는 서울 가는 게 너무 버거워 주말에 나가는 것조차 싫었는데 지금은 집 앞의 도림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익숙한 안양천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담기고 사람들이 적당히 붐비는 거리를 걸으며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매번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돌아다닐 때와는 영 다른 기분이 든다.
익숙함이라는 타성에 젖어 거처 마련이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울행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이 모든 안락함 대신 여전히 불편함 속에서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냈던 건 이제는 가야할 때가 됐다는 모종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반복되어 온 업무가 너무 지겨웠고 늘 만나던 사람들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으며 쌓여온 불평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업무를 해야하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까지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는 게 지난 겨울 내린 결론이었다.
관사에서 짐을 빼서 새 집으로 이사하기까지 한 달 여가 걸렸다. 관사 퇴거일자와 계약서상 입주일자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오피스텔 내의 창고로 잠시 짐을 보관했다. 때문에 이사를 2번 진행해야 했다. 안산에서 짐을 싸들고 온 다음 다시 창고에서 짐을 빼 내리는 것까지. 그래도 다행인 건 그 기간 동안 지낼 곳이 있었다는 것 짐을 보관할 빈 창고가 오피스텔 내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꽤 어수선한 한 달이었지만 다행히 그 기간 동안 부모님댁에서 지내며 호의호식했다. 밥 할 걱정도 없었고 그저 편안히 숙식을 제공받으며 지냈다. 부모님도 2년여 만에 딸이 집에 잠시 돌아온 거라 귀찮아 하면서도 잘 챙겨주셨다. 과거에 함께 지냈을 때보다 더 평화로웠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론 부모님 생활패턴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말이다.
100%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은 없을 거다. 그래도 행복의 퍼센티지는 전보다 많이 올랐다. 이 정도면 됐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지금의 평화를 망치고 싶지 않다. 잘 하고 싶다. 이제는 힘들었던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새로운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