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니던 회사를 아이들 방학에, 감기에 자꾸 빠지게 된다는 이유로 그만두면서 신랑에게 큰소리를 쳤었다.
여기서 받던 월급만큼은 내 꼭 벌어오리라고.
아이들이 쓰던 스케치북 한 장을 쭈욱 뜯어서 비장하게 크레파스로 제목을 적었다.
[아이들 케어하며 할 수 있는 일(10시부터 4시까지)의 목록]
오늘 아주 그냥 결판을 내고 말겠어 다짐하며 씩씩하게 몇 자 적었다.
1. 보험영업 2.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3. 목수? 4. 사업?
" 하... 없네 없어 "
힘이 들어갔던 자세가 그새 흐트러지고 턱을 괴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고 기술도 없고 낙하산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별로 없었다.
" 이러니까 출산율이 자꾸 떨어지는 거야 "
괜히 나라 탓을 하며 구시렁거리다가 하나씩 노려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보험 영업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에 부합하는 항목이다.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에 아이들 방학이며 일 있을 때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
두 번째.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최저시급 9,160원에 5시간 x 20일 = 916,000원이다. 이마저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 나이에서 족족 떨어지니까.
목수도 관련 기술이 없으니 탈락. 사업도 지금 당장 200이라도 벌어와야 할 형편에 초기 자금이다 뭐다 준비할 여력이 없다.
어째 나는 인생이 이러냐.. 막 사회에 나갔을 때랑 변한 게 없냐 싶었다.
그때는 일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여유로웠지 말이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2번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도 직직 지워버리고 3번 목수도 진작 지워버렸고 4번 사업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고 결국 남아 있는 건 1번 보험영업뿐이었다.
보험 영업이 잘 못 되었다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자산가 10X의 저자인 그랜드 카돈도 25살에 영업사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멋진 분들도 많고 의지만 있다면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잠재력이 내게서 나와줄지도 잘 모르겠고 보험 영업이라고 하면 지인 영업이다 뭐다 거부감 드는 건 사실이어서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선택지가 없었다.
몇십 년 만에 좋아하는 일을 찾았는데 이렇게 저렇게 발버둥 쳐봐도 업무 분야를 바꿀 수 없다니..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바로 연결시킬 수 없다니..
하.. 슬프지만 어쩌겠나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홍보하고 디자인하는 쪽에 백날 이력서 내봐도 감감무소식이고 어쨌든 지금 당장 신랑에게 큰소리친 만큼은 벌어와야 하는데 계속 구시렁거려봤자 시간만 더 지나갈 뿐이었다.
' 그래!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까?를 논하기 전에 지금 당장 벌어올 수 있는 돈으로 밑바탕을 쌓아놓고 그 위에 좋아하는 일을 쌓아 조금 더 튼튼한 탑을 만들자! '
그리고 꼭 굳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야 할까? 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까지 벌면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있어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축복과 같은 일이겠지만.
돈 버는 시간과 좋아하는 것을 하는 시간이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될만한 일인가?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히려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늘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나?
' 얼른 실력을 키워야 해! 얼른 더 잘해야 해! 얼른 인정받아서 이걸로 돈까지 벌자! '라고 하며 말이다.
'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게 그냥 좋다며!
네가 좋아하는 애를 왜 그렇게 안달복달이야.
그냥 즐겨. 행복해하고 사랑해주라고. '
왜 그렇게 옆에 끼고 살았던 드로잉용 아이패드를 처박아 놓고 몇 달째 꺼내고 있지 않은 건지 깨닫게 되었다.
돈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실력은 그만큼 안되고 힘은 잔뜩 들어가서 즐기지도 못하니 당연히 재미가 없어졌던 것 아닌가.
분명 글도 마찬가지였을 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걸로 밥이나 먹고살겠니? 하면 금세 또 재미없어져 버릴 일 아녔을까.
좋아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하지만 그 일로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죽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걸로 인정받기 위해 용쓰다 지쳐서 그만 좋아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
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
좋아하는 일로 돈 벌기에 대한 힘을 빼고 일은 일대로, 꿈은 꿈대로 즐기자며 한걸음 나섰지만 조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영업조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2~30명 정도의 신입들이 교육받는 곳이었고 어색하게 맨 앞자리에 앉아 교육을 듣게 되었다.
교육을 들으면서도 마음속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하.. 결국 왔네 '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 놓았던 일이었다.
"정 안되면,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 갈게.. "라고 1년 동안 이 일을 권유했던 친구에게 이야기했었는데 말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힘없이 쭈구리처럼 앉아있는 내가 못내 거슬렸나 보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싶은 호탕하고 괄괄한 강사님이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자꾸 나를 지목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 에.. 잘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대답이나 해대고 있는 내게 강의가 끝나갈 무렵 또 질문을 했다.
" 당신에게 지금 뭐가 가장 부족합니까? "
" 예??... 아... 글쎄요... 자신감이요?... "
" 그럼 자신감만 채워지면 되다는 거잖아요? 자! 그럼 자신감을 키울 수 있게 내가 도와주지!! 이리 나와봐요!! "
" 네???? "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장난이길 바랬지만 덧붙인 한마디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여기 이 많은 사람들 기다리게 할 거예요?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 "
나가서 멀뚱히 서있는 내게 두 손을 포개라고 했다.
" 자!!! 노래 한 곡 부르세요!! "
(아놔... 씹때꾄ㅇㄷㅎ데ㅐㅓ)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앉아있던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와서 노래를 부르라고?
속에서는 쌍욕이 나오고 있었지만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30여년 인생에 그 많은 애창곡 중 단 한 곡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불러야 할 노래는 생각이 안 나고 우리 엄마 애창곡 애모 라던지, 우리 아이들이 자주 부르는 섬집 아가 정도만 생각이 나는 미치고 팔짝 뛸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그때 멀리서 구원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슬로비디오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 아~~ 무~~ 거~나 불~~~ 러~~ 비 ~~ 내 리는 호~남~~~ 선 ~~~~ )
30명 중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고 지체할 틈 없이 바로 불러버렸다.
1절까지 고작 1분 정도 됐을까?
1분이 10분처럼 흘러가는 기적을 경험하며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왠지 슬퍼 보이는 내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를 당황하게 만든 그 강사님께 욕을 날려주지는 못할망정 당신을 사랑했어요 구절에 맞춰 하트를 날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들어왔다.
잠깐 슬퍼 보이는 내 모습에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첫날부터 자신감을 선물 받았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내게 저녁 10시의 시간은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 재워놓고 타닥타닥 소리 들으며 글 쓰는 시간은 낮에 내가 어디서 헤매고 있던지 언제나 돌아온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키보드의 타닥타닥 소리가 왠지 홀가분하게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 어떻게든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거라고!!!! ]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가락에 힘이 빠지니 조금 후련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