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10월 22일은 천사의 날이었어.
10월 22일 자정을 조금 남겨 놓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친정아버지 생일이라 오랜만에 친정에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 먹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친정집은 그 옛날에 꽤 신경 써서 지었을 법한 돌들이 멋스럽게 박혀있는 오래된 빌라 맨 꼭대기 복층 집이다.
가끔 2층 방문을 분명 닫고 내려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열려있다거나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이 친정에서 술 먹고 2층 테라스에서 꺼이꺼이 울었을 때 갑자기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지는 일이 있었다거나 조금은 으스스할 때도 있는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어느 집이나 가끔 으스스할 때도 있곤 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잘 살았고 10월 22일 자정쯤에도 여느 때와 같이 결혼 전에 쓰던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느낌이지만 명상을 시작하고부터는 뭔가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다.
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졸린데 정신은 말똥 하고 왠지 으스스한 기분에 오한처럼 소름이 돋는 느낌.
' 아... 잠은 안 오고 거참... 이 이상한 기분은 뭐야? 나 지금 무서운 거야? '
예전의 나는,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들고 으스스 오한이 느껴지면 애써 떨쳐버리려 이불속으로 파고들거나 엄마 옆으로 가서 손잡고 자거나 했을 텐데 이상하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예전에 무섭다고 느끼던 때랑 비슷한 느낌이네.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
그냥 한번 작정하고 풍덩 그 느낌에 빠져봤다.
거부하지 않고 힘을 빼고 그 느낌을 온전히 느껴보자. 시도해 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감은 눈앞에 동글동글 회오리치는 원들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그 신비스러운 광경에 넋을 놓고 감탄했던 것 같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들이 가지각색의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그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지만 이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만의 가상공간. 파도가 없는 바닷가 앞이었다.
나의 무의식 바다에 돌멩이가 던져졌고 언제 어떤 기회가 오려나 눈 빠지게 쳐다보던 그 바닷가 말이다.
" 하.. 뭐야.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네. 이 거대한 물덩어리 같으니라고! 그만 좀 움직여 주면 안 될까? "
내 딴에는 1화부터 12화 지금까지 고뇌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하며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힘들었는데 그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될 대로 되라지! 꿈이고 뭐고 나의 길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
햇볕이 따뜻하게 데워놓은 모래사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아씨.. 눈부셔 "
' 바다에 파도는 없으면서 뭐 이렇게 디테일한 햇빛이야? 무의식 공간을 만들 거면 좀 멋있게나 만들어 놓던가. 의자 하나 없고 파라솔 하나 없냐 '
분명 내 무의식 가상공간이니 내가 만들었을 텐데 센스 한번 영 꽝이다.
눈부신 햇볕을 손등으로 가리고 잠깐 누워서 쉴 참이었다.
' 응? 뭐지? ' 손등으로 막고 있던 햇빛이 점점 시원해지면서 검은 그늘이 드리워지는 게 아닌가.
' 아 뭐야 ~! 이제 비까지 내리려고 하는 거야? '
바다에 파도는 빼놓고 뭐 이런 미친 디테일인가 싶어 잔뜩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는데 웬 엉덩이가 내 머리를 덮어버렸다.
" 꺅!!!!! "
" 아 미안! 조준을 잘 못했네? "
머쓱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때 그 고양이.
" 지난번에는 땅에서 기어 나오더니 이번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야? "
반갑긴 하지만 엉덩이 공격에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주섬주섬 낙하산을 정리하며 내 앞에 와 앉는 고양이.
" 왜 또 뭐가 문제야? " 짜증이 조금 섞인 말투다.
엉덩이를 내리꽂은 건 본인이면서 지금 나한테 짜증 내는 거야?
일단 두고 보자. 또 막 사라지면 안 되니까.
" 아니...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방법을 찾으라고 내 등 떠민 거라고 했잖아? 근데 도무지 모르겠어.. 그냥 포기하고 싶어.. "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대답하는 고양이.
" 아.. 그래? 그럼 그냥 포기해 "
' 아놔.. 요 콩만 한걸 한대 콱 때려버릴까? "
움찔거리는 주먹을 봤던 걸까? 다시 말을 이어가는데
" 너 말이야. 내가 그렇게 계속 얘기했던 건 해봤어? "
" 뭐? "
" 힘 빼는 거 말이야. "
" 아.. 힘 빼는 거? 잘 안돼. 자꾸 현실이 갑갑하니까 좋아하는 글쓰기, 그림 그리기로 뭔가를 찾고 싶은데 방법이 없는 거 같으니 스트레스받고, 그냥 현실에 집중하자니 고역이어서 또 스트레스받고 "
"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
" 아놔.. 죽을래? "
" 휴... 너 뭐 좋아해? 뭐할 때 행복해? "
" 글쎄... 믹스커피 한잔 마실 때도 행복하고 산책할 때도 행복하고.. 지난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
" 그럼 힘 빼고 다 포기하고 하루 종일 믹스커피나 계속 마시고 산책이나 계속해 "
" 이런.. 씨.."
오늘 작정했나. 벅벅 긁어대는 고양이 녀석. 엉덩이 등장부터 맘에 안 들었어.
내 이마에 잔뜩 성난 주름이 보이지 않는지 내 말을 자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데
"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면 그 시간 동안 계속 믹스커피를 마시라고 바보야! 행복해지라고! 조금씩 자주 할 수 있는 것들로 행복해져야 해. 한잔의 믹스커피를 생각하며 버티고 끝내 행복해지며 하루를 마무리해. 네가 일을 하는 시간에도 한숨 쉬고, 퇴근해서도 영 방법을 모르겠는 꿈의 길 때문에 또 한숨 쉬며 하루를 한숨으로 마무리하고 있잖아. 그렇게 잠드는 한, 미안하지만 웃는 내일이란 없어. 너는 투덜거리며 일을 하다가 또다시 사직서를 내고 포기할 거고 다른 곳에 가서도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
" 아니.. 어떻게 그런 무서운 소리를 막 하냐.. 그리고 어떻게 믹스커피만 계속 마셔? 믹스커피에 들어있는 설탕이며... 카페인 많이 마셔서 잠 못 자면 책임질 거야? 뭔 소린지 대충 알긴 하겠는데.. 하기 싫은 일을 하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고 어떻게 매번 긍정적이 되냐고.. 믹스커피 한잔 마실 때만 잠깐 행복할 텐데.. 그러려면 5분에 한잔씩 마셔야 할 걸? 그렇게 마시다 보면 결국 믹스커피 마시는 것도 행복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 "
" 그건 정말 네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것들의 본질을 찾아. 진짜 행복을 찾으라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주 행복해지도록해.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야. "
.....
잠시 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다 정리된 건 아니었지만 옆에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어서 보내줘야겠다 싶었다.
" 그냥 그거면 된다고?... 그냥 행복해지려 노력하기만 하면 돼? "
" 응. 그거면 돼. 행복은 행복을 끌어오거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이 진짜 네 행복이 맞다면 자연스럽게 너는 행복한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요즘 인간들은 좀 그래.. 쓸데없이 너무 심각해. 하..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말이야. 숨이 다 막힌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주섬주섬 낙하산을 만지작 거리는 고양이.
" 이제 가려고? 이렇게 가면 언제 또 나타날 건데? "
" 내가 원래..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가 아니거든? 너 마지막화 쓴다고 해서 특별히 나와준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당분간 시끄럽게 나 부르지 좀 말고. 알았지? "
홀가분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하고는 올 때처럼 낙하산에 대롱대롱 매달려 하늘로 떠오르는 녀석.
점점 멀어지는 녀석을 보며 소리쳤다.
" 아니 그럴 거면 진즉에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방법을 찾으라고 하는 둥 그런 말 말고 그냥 행복해지라고 했음 됐잖아? 이 망할 고양이야!! "
점이 되어 사라져 가길래 소심하게 소리쳐본 건데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렷이 들리는 한마디
" 퍽이나 네가 그렇게 했겠다 "
....
맞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시의 나는 찾았어야 했다.
비상 탈출구를 말이다.
행복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갔던 그 무렵의 나는, 절실했다.
그냥 즐기라며. 그냥 글 쓰면서 행복해지라고. 백날천날 말해줘도 귓등으로 들었을 거다.
' 무조건.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로 돈 버는 방법을 찾아보자 '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그 길을 찾으며 행복했나?
나는 행복했을까?
늘 조바심이 났고 답답했고 출근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입안이 까끌해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눈 뜨는 게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하러 가는 게 고역이니까.
오히려 밤의 글 쓰는 달콤함을 깨달아서 낮의 까끌한 시간들이 더 고역이 되어 가는 것 같았는데
오늘 고양이가 알려주고 갔다. 다 필요 없고 그냥 행복해지라고 말이다.
'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되도록이면 소소한 것들로 자주자주. 불행한 시간들을 행복한 사소함으로 채워나가 봐. 행복은 크기에 비례하지 않아. 오히려 횟수에 비례하지. 작은 것들로 행복해지다 보면 네가 원하는 곳에 가있을 거야. 잊지 마. 너는 행복하려고 이곳에 왔어. '
꿈을 찾았던 것도. 그 꿈으로 무언가 되고 싶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럴듯한 행복을 담보로 지금 순간에 널려있는 작은 행복들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고양이가 던져준 숙제를 풀기 위해 내일 당장 나는 뭘 해야 행복할까? 생각해봤다.
마음껏 행복해지라고 던져준 숙제라서 뭐 그까짓 거 싫은 거 하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 거 찾는 거 일도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전혀, 천만에.
내가 당장 내일 뭘 해야 행복할지를 모르겠다.
앞으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며 하루에 하나씩 꼭 행복해질 작정인데 버킷리스트 작성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산책, 명상, 타로, 독서, 아이들 안아주기 외에 여태껏 작성을 못하고 있다.
행복해지려고 즐기려고 내려온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세상에서 정작 내가 행복한 것은 고작 몇 개뿐이라니..
[ 내 진로 찾기.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방법 찾기 ]로 시작한 이 글의 마무리가 [ 꿈은 됐고, 그냥 즐겨 ]가 되었다.
정말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일단은 고양이가 내주고 간 숙제가 있으니 앞으로 힘 빼고 조금씩 자주 행복해져보려고 한다.
버킷리스트부터 막혔지만..
뭐 햇살 좋은 날, 믹스커피 마시며 산책하다가 조용한 벤치에 앉아 눈 감고 명상하며 책도 좀 보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 안아주고 타로카드로 내가 뭘 좋아하나요? 물어보면 그깟 버킷리스트 금방 작성할 수 있겠지 뭐.
잊지 말자.
자꾸 생각이 무거워지려고 할 때면
" 우린 행복해지려고 이곳에 왔어. 지금 너는 행복하니? "를 떠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