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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버스 Oct 12. 2022

9화 -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뭔가 하고 싶기도해

지독한 무기력증이란



" 여보, 나 뭔가 힐링하고 싶어 "

아이들 재우고 나와서 신랑에게 이야기했다.


“ 오랜만에 티비 볼래? ”


" 아니. 티비 본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아 "


“ 내가 애들 보고 있을 테니 혼자 바람 쐬고 올래? ”


" 아니... 이 시간에 어디를 가? 혼자서... "


“ 그럼 뭐 먹을래?"


"아니...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 "


“ 커피 사다 줄까? ”


" 그래 그게 좋겠어 ! 달달한 바닐라라떼로 부탁해 "


평소 같으면 몇 번 참아주다가 “ 그러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 ” 버럭하며 한소리 날아왔겠지만, 오늘은 내가 기분이 영 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꽤 다정하게 굴었다. 신랑이 커피를 사 오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이들 재우고 난 황금시간을 뭘 하며 보내는 게 조금이나마 힐링이 될지 말이다.


‘ 그림 그릴래? ’

- 귀찮아.


‘ 그러면 그냥 유튜브나 보든가 ’

- 그럴까? 아 근데 역시 그것도 귀찮아


‘ 그럼 오랜만에 만화책? 반신욕? 아니면... 너 뭐 좋아하더라? ’

- 나 뭐 좋아하지? 나는 그냥... 우리 아가들 귀여운 볼 부비부비해주는 거 좋아하고. 햇빛이 따스한 날 산책하는 거 좋아하고. 따뜻한 커피를 소주 마시듯 캬~ 하면서 먹는 거 좋아하고. 그리고... 모르겠어. 그냥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기분은 조금 나아졌으면 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기분은 조금 나아지고 싶다는 느낌.>

주기적으로 가끔 이런 느낌이 찾아오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그냥 나도 모르게 만사 짜증을 내다가 잠들거나, 침대를 가로로, 세로로 굴러다니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어차피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 이였다.

하지만, 꿈찾기 여정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관찰하다 보니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가 관찰하는 대상이 시무룩해져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기분은 나아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신경이 쓰여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거는? 저거는? 그래서? 그렇다면?

그러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는걸. 몸과 마음이 한 팀이 되어서 무기력 속으로 빠트린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뭘 해도 흥미가 나지 않도록. 그래서 가만히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말이다.

‘ 멈춰! 긴급상황이야. 너 지금 아파. 상처받았어. 이것저것 할 게 아니라 마음을 돌아봐. 마음이 뭐라는지 들어보고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고 위로해줘 ’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한구석이 아프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될까? 누가 대체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든 거야? 맞아. 그 xx였지? 아오 화가나! 아무리 그래도 그 xx가 잘못했어. 아픈 상처는 이미 뒷전이다. 상처 준 사람을 쫓아가서 한바탕 따질 기세다. 나도 그랬다. 오늘 오전에 전 회사와 깔끔하지 못했던 뒤처리를 하며 대표님에게 욕이란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너덜한 상처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전화는 받지 않으시고 카톡으로 조롱과 질타를 쏟아붓는 쓰나미 공격에 집에 가는 동안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는 정신 상태로 도착했다.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있었다. 그러다 화가 났다. 신나게 같이 씹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신나게 두들겨 맞은 내 마음의 상처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침대나 뒹굴뒹굴하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뭔가 찜찜한 이상한 기분을 ‘ 괜찮아~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또 기분이 좋아질거야’라고 애써 무시하며 말이다.


마음을 때려 맞는 것은 눈에 보이는 곳을 때려 맞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다른 사람이 알아봐 주기도 하고, 거울을 보면 훤히 보이니 치료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데 마음이 아픈 건 스스로가 찾으려 하지 않으면 예전의 나처럼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지나간 것일까? 나 정말 그동안 괜찮았던 걸까?


나는 마음의 상처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유별나게 아팠던 기억도 유별나게 좋았던 기억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기분은 조금 나아졌으면 좋을 것 같은 느낌 >을 관찰하다 보니 그동안 이런 식으로 넘겼을 상처들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동안 이유 없는 짜증으로, 이유 없는 적개심으로, 이유 없는 벽으로 상처들이 신호를 주고 있었는데 들여다볼 생각은 못 하고 ‘ 인간관계 너무 어려워. 나는 그냥 혼자가 편해’라며 숨기 바빴다.


상처들을 치료하지 못하고 다른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하니 내 마음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 안돼 ! 더 이상의 상처는 안 된다고. ’ 상처의 마지노선이 잘못하면 무너질까 봐 마음속에서 삐 용 삐 용 사이렌을 울려댔다. ‘ 오지마! 그 어떤 누구도 나한테 다가오지마! 더 이상의 상처는 안 되니까 이미 오래된 인연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만 만나라고 ’









나는 전근을 많이 다녀야 하는 아버지 직업의 특성상 유년기에 이사도 많이 다니고 전학도 많이 다녔다. 거의 한 학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닐 정도로 말이다. 지금의 나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경고 사이렌이 신나게 울려댔을 텐데 당시의 나는 오히려 그런 새로운 환경이 재미있었다. 전학 간 첫날. 자기소개를 할 때면 20명 남짓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쉬는 시간이면 우르르 몰려와 퍼붓는 질문 공세를 은근히 즐길 정도로 말이다.


덕지덕지 아물지도 않은 상처들이 얼마나 내려앉았으면 내 마음이 MBTI마저 바꿔 놓았던 것일까? 오늘 나는 조금 신경 쓰이는 내 기분을 관찰했을 뿐인데 숨겨져 있던 MBTI를 찾아냈다. 잊고 있던 MBTI를 찾았다고 바로 외향적으로 바뀔 수는 없겠지만 곪아서 냄새나고 있던 상처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나만의 새로운 진짜 MBTI를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어쨌거나 저쨌거나!

상처를 치료하고 진정한 MBTI를 찾긴 할 건데 말이다...

전 회사 대표님의 조롱과 질타 쓰나미를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중간부터 씹고 있었는데, 차마 그 뒤 내용들을 읽어볼 용기가 바로 생기진 않는다. 상처 총량의 법칙에 따라 예전 상처들부터 하나씩 치료하다 보면 언젠가 마저 읽어볼 용기가 생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당분간 어쨌든 나는 안읽씹이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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