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할 무렵 엄마도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일흔이 다 된 엄마가 직장에서 일하시는 모습은 보기에 짠했지만,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듯이 나도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떠나 보낸 이후에 항상 일을 하셔야 했던 엄마는 경제적 가장으로서 선배였다.
엄마가 처음으로 하신 일은 동화구연가였다.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지만, 초창기 색동어머니회 멤버로서
문화센터나 학교 등에서 일자리가 꽤 많기도 했고, 워낙 표현력과 목소리가 좋았던 엄마는
항상 일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대학생들, 주부들까지 다양하게 누군가를 지도하시던 엄마가 동화 구연가라는 직업으로
우리를 먹이고, 기르고, 대학까지 보내셨다.
하필 제일 돈이 많이 드는 나이의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신 아빠가 보시면 진짜 놀라셨을거다.
평생 가정 주부로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시던 엄마가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왔을까?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런 입장이 되고 보니
내 밥그릇 챙겨야 하는 상황이 제일 나를 성장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냥 나로 먹고 산다는건 나름 괜찮았다.
분명 힘든 상황에서 엄마도 살기위해 공부하고 성장하고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사셨을 것이다.
엄마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본인이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 살면서 더 강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시던 엄마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동화구연 일을 드물게 하시다가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하시기도 하고 쉬시기도 하면서 이것 저것 공부하셨다.
그리고 60이 넘어서 노인요양보호사로 일하시기 시작했다.
본인도 노인이면서 몸을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을 돌보시고 궃은일을 하시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항상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이 일을 할 수 있다는게 감사하다고 하셨다.
“노인들을 돌보는 일이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게 참 감사해.
그리고 그분들이 얼마나 나를 예뻐해주시는지 아니?
매일 안아드리고 인사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나만 기다리시는 어르신도 있으셔.
이 나이에 이렇게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이니.”
항상 밝은 에너지가 있는 엄마는 직장에서도 활기차게 생활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역시 직장에서의 문제는 일 자체보다는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컸다.
점점 나이가 많아지는 엄마를 나이로 무시하거나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다른 노인 요양사들때문에 속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를 받아들이거나 내가 한 말의 의도와는 다르게
곡해하는 동료들을 억지로 참아가며 회사 생활을 하는게 힘들었다.
엄마도, 나도 누군가로 인해서 내 삶이 흔들리는 힘겨운 경험을 하며
하루 하루 버텨가는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의 아픈 아들을 위해 음식과 약값, 병원비 등을 벌어야 했고
나는 내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어찌되었든, 목표가 있는 삶은 그럭 저럭 현재의 힘든 일을 버티게 한다.
시간이 흘렀고, 엄마는 더 이상 돌봐야 할 아들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일을 계속 하신다.
내가 일을 좀 그만두고 쉬시라고 말하고 나면 엄마는 항상 말씀하신다.
"앞으로 나한테 쉴 날이 많지. 일 할 날이 많겠니. 한 살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감사하지."
엄마의 일은 이제 간병인이다. 누군가의 아프고 힘든 병원 생활을 도와주는 도우미로 일을 하신다.
칠십이 넘은 나이의 엄마가 일을 한다는 사실, 그것도 몸을 쓰는 힘겨운 일을 한다는 사실은
마음 한켠을 항상 아프게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직장 이야기를 하시고, 자신이 번 돈으로 나에게 고기를 사 주시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엄마가 사회인으로서 돈을 버신다는 것은 하루 하루 엄마 자신의 삶을 사신다는 뜻이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평생 엄마 자신으로 살아오신 엄마의 삶은 누구보다 자유로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