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선 웬디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깜빡였다. 식당의 풍경이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마가렛이 자주 사용하는 수수한 자기 그릇과 컵이 놓였을 자리에,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투명한 식기들이 즐비했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식기 표면에 부딪히자, 굴절된 빛들이 식당의 벽면과 천장에 흩어져 무지개 파편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웬디는 자신이 거대한 보석 상자 속으로 들어온 걸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가렛, 오늘 식기는 평소 보던 것과 다르네요?”
마가렛은 하얀 면천으로 유리잔에 묻은 얼룩을 세심하게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길은 평소보다 배는 정성스러웠다.
“오늘 오는 손님은 감각이 아주 예민하시거든. 특히 금속 특유의 비린내와 도자기의 텁텁한 냄새를 몹시 싫어하셔서,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유리와 백수정으로 만든 식기만 사용하신단다. 입술에 닿는 빨대 하나까지도 모두 특수 제작한 유리지.”
“그러면 이게 다 수정이라고요?”
무심코 식기에 손을 뻗었던 웬디는 혹여 지문이라도 남을까 급하게 팔을 거두고, 상대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유리잔을 집었다. 마트에서 주류 코너의 재고를 정리할 당시, 웬디는 평소보다 긴장을 바짝 하곤 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값비싼 와인을 깨뜨렸다간 한 달 치 월급이 통째로 증발하는 참사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마가렛, 블러디 와인은 준비됐나?”
그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리며 에드먼드가 들어왔다.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웬디는 하마터면 손에 쥔 컵을 놓칠 뻔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턱과 뺨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던 에드먼드의 풍성한 수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뒤로 넘겨 고정한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 덕분에 에드먼드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젊고 품위가 넘쳐 보였다.
“오늘 오는 손님이 내 평소 모습을 진저리치게 싫어하거든. 덤불 속에 사는 노숙자 같다나 뭐라나.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독설을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시간을 투자하는 게 속이 편해.”
에드먼드는 자신의 매끈해진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웬디는 지금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다 부루퉁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평소보다 빳빳하게 세운 셔츠 깃과 광택이 도는 버건디색 조끼를 통해 오늘 손님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블러디 와인은 와인셀러 제일 상단에 있다네, 에디.”
“온도는 12도로 맞춰놨겠지?”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12도야. 원한다면 직접 확인해 보렴.”
두 사람이 이토록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는 걸 보니, 웬디도 슬며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늘 방문할 손님이 얼마나 깐깐한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떤 분이 오시기에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건가요? 혹시 아주 높은 귀족이나 왕족, 그런 분인가요?”
웬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드먼드는 품에서 진홍색 봉투를 꺼내며 말했다.
“엊그제 듣지 않았나? 닉이 전달해 준 편지 말일세.”
“아! 그, 뱀파이어 분이요?”
웬디는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코코 와일드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때는 뱀파이어라는 괴담 속 존재를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했을 뿐이지만, 에드먼드와 마가렛의 반응을 보니 코코라는 인물 자체가 거대한 압박감을 몰고 오는 듯했다.
“코코 와일드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하신가요?”
“대단한 분이지. 본인이 원한다면 그동안 쌓아온 재산으로 세상을 유랑하며 살 수 있을 텐데, 여전히 현역으로 뛰며 업계를 주름잡고 있으니까.”
“현역이요?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에드먼드는 눈짓으로 봉투를 확인하라는 시늉을 했다. 웬디는 봉투 중앙에 금박으로 찍힌 ‘W’ 마크를 보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그녀도 익히 아는 브랜드였다.
“코코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라네. 자신의 성씨를 딴 ‘와일드(Wilde)’라는 브랜드를 설립했지.”
“맙소사!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인 그 와일드요?”
와일드는 명품에 문외한인 웬디조차 익히 알 정도로 유명한,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와 같은 브랜드였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수트와 가방들, 심지어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을 붙인 가방은 천만 원을 넘기기도 했다. 그런 브랜드를 창립한 인물이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였다니, 그야말로 세상이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와일드는 창립한 지 백 년도 훨씬 지난 브랜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직접 활동하는 거죠?”
“당연히 세간의 눈을 속여야 하니까, 코코 와일드 1세 대신 그녀의 딸인 코코 와일드 2세가 경영권을 승계받았지. 그래봤자 실상은 같은 인물이라, ‘모녀동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군.”
에드먼드는 자신의 농담이 꽤 만족스러운지 혼자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런 유명세를 떠나서, 코코는 이 산장의 은인이기도 하다네. 숲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석을 구할 때 가장 큰 자금을 후원해 준 인물이거든. 사실상 산장 설립의 일등공신이지.”
“동시에 우리의 가장 무서운 비평가이기도 하지만.”
마가렛이 조용히 덧붙이자, 에드먼드도 부정할 수 없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코코가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휴가 첫날만 무사히 지나가면 그 뒤부터는 괜찮을 걸세.”
“왜 하필 첫날인가요?”
“휴가를 오면서도 산더미 같은 업무와 연락을 그림자처럼 달고 오거든. 휴식을 취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급하게 처리할 일들이 쌓여 있으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그래도 업무들을 첫날에 모두 처리하고 나면, 뱀파이어 전용 맞춤 관에 들어가 휴가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잔다네. 아니, 잠깐!”
말을 멈춘 에드먼드는 무언가 번뜩이는 생각이 났는지 웬디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에드먼드의 눈에 의미심장한 기색이 떠오르자, 웬디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다.
“웬디, 오늘 하루 코코의 일정을 도와줄 수 있겠나?”
“제가요?”
웬디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는 패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어떤 게 좋은 원단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걸요.”
“어차피 코코도 자네에게 전문적인 역량을 바라지는 않을 걸세. 그저 그녀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서류를 정리해 줄 일일 비서 역할만 해준다면 충분하네. 예전에 서무 업무도 했다지 않았나?”
웬디는 며칠 전 티타임 때, 과거 경력을 줄줄이 읊었던 일을 떠올리고 후회했다. 마가렛이 대단하다고 칭찬하자 혼자 신이 나서 온갖 이야기를 했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차를 마셨지만, 귀는 그녀를 향해 열어둔 게 분명했다.
“그건 맞지만... 그땐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사람이 부족해서 억지로 떠넘겨 받은 일이었어요. 아는 것도 많이 없고요.”
웬디는 나름 필사적인 변호를 했지만, 이미 에드먼드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코코의 비서 역할로 채택한 듯했다.
“괜찮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거기다 에드먼드가 책임을 운운하니 웬디로서는 더 이상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만약 제가 큰 실수를 해서 코코라는 분의 기분이 상하면 어떡하죠?”
“뭐, 호통이야 들을 수도 있겠지.”
코코의 성격을 아는 에드먼드는 빈말로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말투로 위로하듯 덧붙였다.
“그래도 코코는 이곳을 다시 방문할 걸세. 세상의 눈을 피해 마음껏 휴식을 취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없거든. 그리고 자네의 일머리라면 그런 상황이 생길 것 같지 않네.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게!”
“에드먼드 씨가 저를 너무 믿고 계신 건 아닐까요?”
“하하하!”
에드먼드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웬디는 에드먼드의 과분한 신뢰를 얻게 되었음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무거운 마음을 뒤로한 채, 웬디는 코코가 묵게 될 여름 별채를 미리 점검하러 나섰다. 코코가 산장의 은인이자 무서운 비평가라는 말을 듣고 나니,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창틀의 미세한 먼지도 신경이 쓰였다. 별채에 들어선 웬디는 에드먼드가 미리 옮겨 놓은 검은 육각관부터 살폈다. 뱀파이어의 안식을 위해 특수 제작되었다는 관은 남색의 벨벳 시트로 안쪽을 빈틈없이 마감한 상태였다. 웬디는 혹여 시트에 주름이 잡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팽팽하게 펴냈다. 이후 챙겨온 손수건으로 별채에 비치된 모든 유리잔을 입김을 불어가며 지문 하나 남지 않도록 깔끔히 지워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본관으로 돌아가려던 웬디는 언덕에서부터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분명 정오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는데, 본관에 가까워질수록 봄의 꽃샘추위 같은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동시에 아주 농밀한 장미 향이 코끝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리고 현관에 들어선 웬디는 프런트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선 여자와 마주했다. 그녀는 챙 넓은 검은 모자 아래로 몸의 곡선을 따라 유려하게 재단된 자색 코트 차림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선글라스는 묘한 압박감을 불러일으켰다. 웬디는 본능적으로 저 손님이 코코 와일드임을 직감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은 채, 본관 내부를 느긋하게 돌아보며 숨을 들이켰다.
“코끝이 간지러울 정도로 지독하게 평화로운 냄새라니. 여긴 매년 올 때마다 여전하군. 좀처럼 변하지를 않아.”
여자의 나른한 말투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음에도 모두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고 앞으로 내밀었다. 에드먼드는 능숙하게 그녀의 장갑을 받아 들며 미소를 지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코코.”
코코는 대답 대신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어 코트 앞주머니에 끼웠다. 전등 아래 드러난 눈동자는 핏빛이 일렁이는 짙은 갈색이었고, 눈매는 잘 벼려진 가위 날처럼 날카로웠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의 조합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모델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였다. 본관을 꼼꼼히 살피던 시선은 다시 에드먼드의 얼굴을 평가하듯 무심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을 눈치챈 에드먼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는 길은 괜찮았나? 오늘 숲의 기류가 제법 사나웠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더군. 가지가 멋대로 뻗어 나온 꼴이 싸구려 기성복 같았어. 그래도 도시의 역겨운 매연이나 소음 섞인 공기보다는 참을 만했지.”
“자네는 칭찬을 참 창의적으로 하는군. 요즘도 바쁜 편인가?”
코코는 석고처럼 하얀 손을 털며 고개를 까딱였다.
“질문이 잘못됐어, 에드먼드. 일 년 중 바쁘지 않은 날이 있는지 물었어야지.”
“세상은 그런 사람을 두고 워커홀릭이라 부른다네.”
“나도 알아.”
코코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영원을 산다는 건 남들보다 몇 배는 부지런해야 해.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은 죽음보다 더한 사치니까.”
그녀의 말에는 영생을 사는 존재 특유의 오만함과 권태로움이 공존했다. 그 사이, 에드먼드는 우물쭈물 서 있는 웬디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