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붉은 눈의 손님 (3)

by 달빛타래

숲의 하늘이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 무렵, 웬디는 별채 테라스 식탁에 음식을 날랐다. 마가렛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 메뉴는 걸쭉한 그레이비소스를 얹은 하얀 버섯 요리와 레어로 구운 송아지 고기였다. 거기에 코코가 좋아하는 블러디 와인과 웬디를 위한 차가운 탄산수도 함께였다.

식탁이 차려지는 동안, 코코는 테라스 의자에 몸을 기울인 채 어두워지는 숲의 어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낮 동안 별채를 지배했던 카리스마는 서늘한 달빛 아래에서 고독으로 변해 있었다.


“코코 씨는 안 드세요?”

“먼저 먹어요. 아까 보니까 기운이 다 빠진 얼굴이던데.”

코코는 팔을 뻗어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시선은 여전히 숲에 고정했다. 자리에 앉은 웬디는 버섯을 포크로 쿡 찍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내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죠. 덩달아 내 험담도 할 테고요.”

코코의 건조한 농담에 웬디가 작게 웃었다. 온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씻겨 나간 자리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찾아들고 있었다.


“저는 험담할 기력조차 없었어요. 심지어 아까 오프너를 떨어뜨릴 때 속으로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아세요? 이대로 쫓겨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요.”

“대체 저를 뭘로 보는 거예요? 그 정도로 도와준다는 사람을 내쫓진 않아요. 와인을 깨뜨려서 내 스케치를 망쳤으면 모를까.”

코코는 붉은빛이 선명한 수정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테라스 너머 숲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웬디는 탄산수로 목을 축이며 낮 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아까 작업하실 때 코코 씨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영원을 살기 때문에 변화에 집착한다는 말씀이요. 그게 정확히 어떤 기분인가요?”

코코는 잔을 기울여 와인으로 목을 축인 뒤 말했다.


“나에게 있어 시간은 흐르는 강물이 아니에요. 오히려 고여있는 늪에 가깝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일은 오고, 십 년 뒤에도, 백 년 뒤에도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겠죠. 누군가는 이걸 축복이라 말하지만, 나는 저주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유리잔 안에서 일렁이는 액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하루를 한계까지 몰아세워요. 일과를 10분 단위로 쪼개고, 쏜살처럼 지나가는 유행에 목숨을 거는 이유죠. 그렇지 않으면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니까요. 나에게 있어 일이란, 시간을 억지로 흐르게 만드는 시계태엽인 셈이죠.”

“그래서 오늘 그 태엽이 정교하게 돌아갔나?”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돌아본 웬디는 찻잔을 들고 걸어오는 에드먼드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빈 의자에 앉은 그는 코코의 얼굴을 살피더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얼굴이 작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군.”

“내 유능한 비서 덕분이지.”

“어허, 웬디는 아직 내 직원이라네.”

“하루가 아직 안 지났으니, 지금은 내 비서지.”

두 사람의 유치한 설전에 민망해진 웬디는 썰어놓은 고기 한 점을 우물거렸다. 살짝 식었음에도 고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만약 코코 씨가 영생을 사는 게 아니라면, 이 산장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무심코 나온 웬디의 질문에 에드먼드가 흥미롭다는 듯 코코를 바라봤다. 코코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글쎄요. 우선 트렁크부터 호수 한복판에 빠뜨리지 않았을까요? 그리곤 마가렛이 해주는 따뜻한 수프를 먹고, 해가 뜨고 지는 걸 멍하니 보면서 게으른 평화를 즐겼겠죠.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휴일처럼요.”

덤덤하게 말하던 코코는 이번에는 역으로 웬디에게 물었다.


“반대로 웬디가 나라면 어떨 것 같나요? 늙지도 죽지도 않고, 해가 뜨고 지는 걸 수만 번도 지켜볼 수 있는 삶이?”

웬디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영원한 삶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환상이지만, 코코가 내뱉은 말속에 담긴 지독한 허무를 마주하자, 설렘보다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코코 씨를 보면서 제가 보내온 시간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깨달았어요. 저는 끝이 있다는 걸 외면한 채 쫓기듯 살아오기만 했거든요.”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죠. 끝이 있기에 그 과정들이 소중하다는 것을요.”

코코는 에드먼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 네가 사계절이 공존하는 산장을 짓겠다고 했을 때, 내가 왜 선뜻 후원했는지 알고 있나?”

“세상의 눈치를 피할 장소가 필요해서 아니었나?”

“그건 부차적인 이유지.”

코코는 자신의 창백하고도 매끄러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지나치게 시끄럽고 인공적이지. 다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누가 더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지 자랑하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지. 비록 숲에 결계를 쳤지만, 넌 시간을 억지로 멈추고 낙원을 만들지 않았어.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했지. 덕분에 나무가 비참하게 썩기도 하고, 꽃이 처참할 정도로 시들어 버리지. 그 당연한 순리를 보고 있으면 내가 살아있다고 느껴지거든.”

코코의 목소리에는 짙은 권태로움이 배어 나왔다. 웬디는 그런 코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려한 코트와 아름다운 외모 뒤에 숨겨진, 흐르지 못하는 시간에 갇힌 안타까운 존재가 달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웬디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코코 씨, 아까 제 앞치마에 묻은 먼지를 기억하시나요?”

“그랬죠.”

갑작스러운 웬디의 말에, 코코가 고개를 까딱이며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웬디는 먼지 묻은 앞치마와 오후 내내 무릎을 꿇느라 살짝 헤진 바지를 가리켰다.


“이건 오늘 코코 씨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생긴 거예요. 그러니 저한테는 이게 오늘의 나이테인 셈이죠. 코코 씨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 않을지 몰라도,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든 수십 장의 스케치와 이 얼룩들은 고여있는 늪이 아니라, 아주 거칠게 흐른 강물 아닐까요?”

예상치 못한 웬디의 대답에 코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짧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코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코코 씨가 내놓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디자인은 결국 변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잖아요. 그런 치열한 몸부림이 있는 한, 코코 씨는 세상에 박제된 게 아니라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흐르는 중일 거예요.”

말을 마친 웬디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했지만, 어떻게든 코코의 고독을 덜어주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위선처럼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풋.”

코코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기더니, 짧은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이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가 금방 내려갔지만, 코코는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눈빛과 함께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자네 직원은 말재주가 아주 고약해.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구석이 있어.”

에드먼드는 낮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내가 특별한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이 맞군. 선물을 받았는데 감사 표현을 안 할 수 없겠지.”

코코는 자기 목에 걸려 있던 가느다란 은색 목걸이를 풀었다. 줄 끝에는 와일드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W’가 세공된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코코는 그것을 웬디의 손바닥 위에 툭 던지듯 올려놓았다.


“받아요. 오늘 내 업무를 방해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조해 준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니까요.”

웬디가 당황하여 에드먼드를 바라봤지만, 그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웬디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쥐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자, 그러면 이제 다들 가서 쉬도록 해요. 나는 이 느려터진 숲을 조금 더 구경하다가 들어갈 테니까.”

코코는 다시 평화로운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는 웬디에게 눈짓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빈 그릇과 쟁반을 챙겨 조용히 여름 별채를 빠져나왔다. 본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까보다 훨씬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웬디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흙 밟는 소리만 일정하게 들려왔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주머니 속에 든 목걸이 덕분인지 웬디의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웬디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던 에드먼드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네. 폭풍의 눈 속에 있었던 기분이 어떤가?”

에드먼드의 물음은 오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웬디는 목걸이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코코 씨를 보면서, 예전의 숨 막히는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아 겁이 났어요. 그런데 막상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코코 씨는 저처럼 도망치기 위해 서두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걸요.”

에드먼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느리게 사는 게 정답은 아니지. 자기만의 속도를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속도가 타인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배려 아니겠나? 그런 면에서 자네는 정말 잘해줬네.”

“그런가요?”

“그 깐깐한 코코가 목걸이를 줬다는 걸로 증명된 것 아닌가? 그녀는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에겐 돈을 주지만, 자신을 이해해 준 사람에게는 자신의 물건을 나눠주거든. 내가 마법석을 받은 것처럼.”

본관에 도착하자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웬디는 빈 그릇이 담긴 쟁반을 주방에 두고 다시 프런트로 나왔다. 그 사이 에드먼드는 안락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일했으니, 내일 오전까지는 푹 쉬게. 오랜만에 늦잠을 자는 것도 좋지.”

“감사합니다, 에드먼드 씨.”

꾸벅 인사한 웬디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은 무거웠지만, 가슴은 묘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코코가 준 목걸이를 꺼내 전등 빛에 비춰보았다. 이니셜이 정교하게 새겨진 펜던트가 천천히 회전할 때마다 벽면에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졌다. 졸음이 쏟아지려 하자, 웬디는 목걸이를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이 흔들렸지만, 웬디에게 있어 그 소리는 아주 다정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산장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고, 웬디의 첫 번째 손님 응대는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나이테 하나를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산장에 도착한 첫날 이후, 코코는 소음을 차단하는 관 속에서 나흘을 내리 잠들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는 새벽녘에 에드먼드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산장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정갈하게 정리된 관과 웬디를 위해 남겨둔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다음 시즌, 산장의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이 나오면 초대장을 보내죠,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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