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붉은 눈의 손님 (2)

by 달빛타래

“올해는 자네의 휴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네.”

“나를 위한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코코의 눈썹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에드먼드는 바짝 긴장한 웬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와 일하는 직원, 웬디라네. 며칠 전까지 도시에서 살아서 여러 업무에 정통한 인재지. 오늘 하루 이 친구가 자네의 일을 보조해 줄 거라네.”

소개가 끝나자, 코코의 시선이 처음으로 웬디에게 향했다. 그녀는 새로 들인 원단의 품질을 감별하듯 꼼꼼한 눈으로 웬디를 살폈다. 웬디는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것 같아 숨까지 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후, 코코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웬디라고 합니다.”

코코의 인사에 웬디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코코 와일드예요. 편하게 코코라고 불러줘요."

"네, 코코 씨."

의외로 살가운 코코의 말에 웬디가 아주 잠깐 긴장을 풀려는 찰나, 곧바로 폭탄 같은 지시가 연달아 떨어졌다.

“지금부터 정확히 15분 뒤에 별채로 이동할 거예요. 저기 로비에 있는 내 트렁크 세 개를 여름 별채 동쪽 창가에 배치하고, 흰색 트렁크 안에 있는 편지들 중 ‘W’ 표시한 것들만 골라 별채 책상 왼쪽에 두세요. 비밀번호는 835예요. 그리고 마가렛을 통해 준비된 와인을 오프너와 함께 챙기는 것도 잊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웬디는 그녀의 지시 사항을 잊지 않으려 머릿속으로 급히 되새겼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 업무에 차질만 안 생기면,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코코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 우아하게 웃었지만, 아쉽게도 웬디의 긴장을 해소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5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이었다. 웬디는 코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비 한복판에 놓인 세 개의 트렁크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손잡이를 쥐고 힘을 주자마자 느껴지는 묵직함에 별채까지 들고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곧바로 에드먼드에게 돌아갔다.


“짐수레가 어디에 있죠?”

코코와 함께 응접실로 향하던 에드먼드는 창고에 있는 짐수레의 위치를 알려줬다. 웬디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밟아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창고에서 철제로 된 짐수레를 챙겨 내려왔다. 웬디는 트렁크를 보이는 대로 쌓으려다 마트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던 기억을 되살려, 가장 무거운 트렁크를 아래에 싣고 부피가 큰 것을 가운데에 놓으며 무게중심을 잡았다.

평소 별채로 향하는 길은 숲의 정취를 만끽하며 걸었을 오솔길이지만, 이 순간 웬디에게 있어서 최단 거리로 주파해야 할 트랙처럼 보였다. 짐수레를 최대한 수평으로 세우며 질주한 웬디는 초록색 보석이 박힌 여름 별채 열쇠로 문을 열고 동쪽 창가에 트렁크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그다음은 편지 분류. 비밀번호가...835, 835였지!”

비밀번호를 풀고 흰색 트렁크를 열자, 그 안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편지 봉투들이 웬디의 앞으로 쏟아졌다. 웬디는 잠깐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빠르게 W 마크가 있는 봉투만 골라 책상 위에 크기별로 쌓아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봉투를 모두 뜯어 일정별로 정리하고 싶었지만, 편지를 분류하는 것만으로 벌써 10분이나 지난 참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웬디는 발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식당을 향해 달려갔다.


“마가렛!”

웬디가 식당 문을 박차며 들어오자, 마가렛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쟁반 하나를 내밀었다. 그 위에는 검은 유리병에 담긴 와인과 백수정으로 된 잔, 그리고 와인 오프너까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 쟁반은 1분 1초가 아까운 웬디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게 필요한 거지?”

“고마워요, 마가렛! 역시 마가렛이 최고예요!”

웬디는 와인이 흔들리지 않도록 쟁반을 꼭 쥐고 잰걸음으로 여름 별채로 복귀했다. 와인과 잔을 협탁 위에 올리자 정확히 14분 50초가 됐다. 터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아내자마자, 별채의 문이 열리며 코코가 들어왔다. 그녀는 곧바로 웬디가 배치한 트렁크와 책상 위에 크기별로 분류한 편지 봉투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합격점을 받았는지 코코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을 시작하죠.”

코코는 실내등을 켜는 동시에 입고 있던 자색 코트를 벗어던졌다. 웬디는 코트가 바닥에 닿기 전에 그것을 낚아채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런 뒤, 와인 코르크를 따고 그녀에게 건네야 하나 고민했지만, 코코의 관심사가 트렁크에 향한 것을 보고 잠깐 미루기로 했다. 편지가 담겼던 하얀 트렁크 외에, 두 트렁크 안에는 여러 권에 달하는 스케치북과 손바닥 크기만 한 원단 조각들이 족히 수백 개는 담겨 있었다.


“웬디는 지금부터 따로 빼낸 편지들을 2차로 분류하도록 하세요.”

신기한 눈으로 원단을 구경하는 웬디에게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분류는 어떤 기준으로 할까요?”

“그건 웬디가 알아서 해주세요.”

난감한 주문을 받은 웬디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지만, 손은 관성을 따르듯 부지런히 움직였다. 웬디는 편지를 하나씩 확인하지 않고 봉투를 열어 모든 편지를 책상 위에 넓게 펼쳤다. 그리곤 성격이 비슷한 것들끼리 분류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편지는 다음 시즌 컬렉션에 소개한 내용이나 파리, 밀라노 등 다가오는 패션위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원단 수급 현황이나 외부 홍보 일정, 생산 공정에 관한 이야기 등 와일드 사 내부의 긴밀한 정보가 담긴 편지도 있었다. 웬디는 자신과 같은 외부인이 이런 기밀 정보를 읽어도 될지 몰라 눈치를 봤지만, 코코는 웬디를 공기 취급하듯 눈길조차 두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기울어진 안락의자에 앉아 손에 쥔 스케치북에 몰입하고 있었다.

코코는 마치 머릿속에 도면이 있는 것처럼 빈 종이 위에 거침없이 선을 그어나갔다. 처음에는 무엇을 그리려는 건지 의도를 가늠할 수 없던 선들은 독특한 디자인의 가방과 옷, 그리고 장식품으로 형태를 갖춰갔다. 패션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웬디였지만, 코코의 손길을 거친 선들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그리는 디자인들이 신기한가요?”

코코가 연필을 멈추지 않으며 묻자, 웬디는 뒤늦게 자신에게 하는 질문임을 깨닫고 말했다.


“네. 이런 디자인을 그리실 줄 몰랐어요. 예술은 잘 모르지만, 선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넘친다는 건 알겠어요.”

“내가 고루한 고성에 갇혀 중세풍 드레스나 그린다고 생각했나요?”

“그건 아니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만의 고집이 늘어난다고 하잖아요.”

웬디의 솔직한 대답에 코코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말은 동감하는 바예요. 어쩌다 동족끼리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면, 다들 과거의 영광에 취해 해묵은 이야기나 늘어놓고 고지식한 충고만 반복하죠. 하지만 패션 업계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요?”

“음,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와 다를 때?”

“아니에요.”

웬디로서는 나름 고민한 뒤 꺼낸 말이었지만, 코코의 대답은 단호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선 사람들의 반응을 배제할 순 없죠. 하지만 패션은 정지된 것을 혐오해요. 내가 영원을 산다고 내 디자인까지 멈춰 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소멸했을 거예요.”

코코는 방금 그린 스케치를 넘기고 새로운 종이 위에 다시 선을 그어 내렸다.


“세상은 계속 달라지지만, 뱀파이어는 변하지 않는 존재예요. 그래서 더욱 변화에 집착하는 거예요. 매 시즌 바뀌는 유행, 계절마다 변하는 원단의 질감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죠.”

웬디는 영원을 산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선 하나에 열정을 쏟아내는 코코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는 고작 몇 년을 일한 걸로도 삶이 지치는 기분이었는데.’

하루를 버티기 위해 시계 초침만 쫓던 날들이, 코코의 눈에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낭비였을까 생각하자 묘한 자괴감마저 들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이제 일에 집중하죠. 편지 분류가 끝났으면 거기에 있는 원단 샘플을 들어요.”

“네!”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내저은 웬디는 코코의 완벽한 휴일을 위해 그녀의 템포에 어떻게든 맞추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웬디는 오감을 바짝 곤두세우고 코코의 모든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손가락을 무엇을 가리키는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 코코의 눈길이 웬디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부터 코코는 스케치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어울리는 원단을 찾기 시작했다. 웬디는 코코가 지시하는 대로 수백 개의 원단 샘플을 바꿔들며 살아있는 마네킹 역할을 했다.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끝이 뭉툭해진 연필을 날카롭게 갈아내는 것도 웬디의 몫이었다. 그렇게 별채 안은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원단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웬디의 다급한 발소리로 가득 찼다.


“웬디, 보라색 트렁크 아래에 있는 벨벳들을 채도 순서대로 나열해 둬요.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볼 수 있게.”

“잠시만요!”

점점 세밀해지는 부탁에, 웬디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벨벳 조각을 코코가 보기 쉽도록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러던 중 몸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팔꿈치가 협탁에 올려둔 오프너를 툭 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다. 쨍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자, 웬디는 허겁지겁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방해를 받은 코코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웬디를 바라봤다. 웬디는 잔소리가 날아올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코코는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웬디가 책상 위에 분류한 편지들을 유심히 살폈다.


“분류 방식이 제법 영리하네요. 업무 성격별로 나눈 건가요?”

“네, 디자인 관련한 내용과 생산 관련 내용이 섞여 있길래 크게 둘로 구분했어요.”

코코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제 원단을 검수해 보죠, 파트너.”

파트너라는 호칭에 웬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피곤함도 잊고 힘차게 답했다.


“네!”

그렇게 오후 내내 폭풍 같은 작업이 이어졌다. 웬디는 체력이 한계에 달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와 별개로 정신은 맑았다. 코코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직전, 미리 준비하여 건네줄 때마다 기묘한 쾌감까지 느껴졌다.

“32번 원단은 너무 뻣뻣해요. 실크 함량을 더 높인 것으로 다시 찾아봐요. 그리고 본사에 이번 시즌 메인 컬러는 작년보다 반 톤 어두운 색상이어야 한다고 전해요. 소식은 에드먼드에게 보내달라고 하면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웬디는 수첩을 꺼내 빠르게 메모를 남겼다. 코코가 툭툭 꺼내는 지시에는 사물을 대하는 명확한 태도와 안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웬디는 패션에 대한 안목이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반 톤 차이는 이 원단 스와치로 확인이 힘든데, 정확한 색상 값을 다시 요청할까요?”

종이 위를 내달리던 코코의 연필이 일순간 멈췄다. 웬디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자신의 지시에 담긴 맹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코코는 고개를 돌려 웬디를 바라보았다. 흐름이 끊겼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불쾌한 기색 대신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코코의 눈매가 처음으로 반달처럼 휘었다.


“그렇게 해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별채의 동쪽 창가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코코가 비로소 연필을 내려놓았다. 웬디는 엉망이 된 앞치마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코코의 옆에 섰다. 고개를 들어 창밖의 숲을 응시하던 코코는 웬디를 향해 따뜻한 말을 건넸다.


“마지못해 일하는 내 비서보다 낫네요. 도시에서 꽤 혹독하게 구른 모양이죠?”

“...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요.”

웬디의 대답에 코코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드먼드가 왜 당신을 추천했는지 알겠네요.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했어요, 웬디.”

“고생하셨습니다.”

웬디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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