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별빛에 홀린 존재들 (3)

by 달빛타래

밤이 찾아오자, 산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요새가 되었다. 밖은 여전히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로 가득했다. 오늘은 마가렛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장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 덕분에 웬디는 늦은 시간에도 마가렛이 타 준 코코아를 마시며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응접실 벽난로는 보라색 불꽃을 피워내며 타닥타닥 타올랐고, 그 옆에는 밍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웬디의 시선은 테이블 중앙에 올려진 은색 램프로 향했다. 제프에게 받은 램프를 한참 전에 내려놨음에도, 황금색 가루들은 멈추지 않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계속 쫓던 그녀가 지나가듯 물었다.


“에드먼드 씨. 혹시 ‘별빛에 홀린 존재들’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돋보기를 쓰며 마법석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에드먼드는 웬디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네가 그 말을 어떻게 알고 있나?”

예상보다 격한 반응이 돌아오자, 웬디는 살짝 당황했다.


“아까 제프 씨가 별빛에 홀린 존재들이 찾아오면, 이 램프를 사용하라고 했거든요.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일까요?”

“제프가 그렇게 말했다고?”

에드먼드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그 모습에 웬디도 덩달아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기울였다.

“‘별빛에 홀린 존재들’은 마법사 사이에서 전해지는 은어라네. 자신만의 중심을 잃어버린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지.”

“중심을 잃어버려요?”

“사람마다 세상을 느끼고 살아가는 감각이 있는데, 이것을 중심이라고 부른다네.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헤맨다네.”

웬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정곡에 찔린 표정을 지었다. 당장 얼마 전의 그녀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영혼 없는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삶에는 상당한 우울함과 상실감이 뒤따랐다.


“그런 존재가 오늘 밤 찾아온다는 건가요?”

“꼭 오늘 찾아온다는 법은 없지. 아니, 정정하겠네. 차라리 오늘 밤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야겠군.”

에드먼드는 바깥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떠올리고 말을 정정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올려진 램프를 흘끗 쳐다봤다.


“한 가지 의아한 건 제프 녀석이 이런 귀한 램프를 선뜻 내줬다는 점이군.”

“왜요? 마차 정리에 대한 대가로 받은 거잖아요.”

“그건 자네가 제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네. 제프 녀석, 능구렁이 같고 방정맞은 상인 같지만, 우리와 거래하면서 한 번도 손해 보는 거래를 한 적 없다네. 그런 녀석이 이걸 선뜻 줬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에드먼드는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는지 돋보기를 통해 램프를 구석구석 살폈다. 마법 물품에 대한 식견이 없던 웬디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따뜻한 코코아와 평화로운 응접실의 분위기는 웬디의 긴장을 서서히 녹였다. 램프 속 가루들이 그리는 소용돌이도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제프의 마차를 정리하면서 쌓인 피로도 함께 밀려왔다. 그렇게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던 웬디의 의식이 수면에 빠지려던 찰나였다.

고요하던 현관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더니,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듯 창문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에드먼드가 들고 있던 램프 속 황금색 가루들이 유리 벽을 강하게 쳤다. 램프가 내는 맑은 금속음 속에서 웬디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이질적인 소리를 들었다.


“에드먼드 씨, 혹시 들리세요?”

웬디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가리키며 묻자, 에드먼드는 램프를 꽉 붙잡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아주 가냘픈 비명에 가까웠다.


“살... 려줘?”

“누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어요! 제프 씨가 말한 별빛에 홀린 존재일 거예요!”

웬디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램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드먼드는 곧바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하네. 아침에도 말했지만, 밤의 안개에 휩싸인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노출된다지 않았나.”

웬디는 붙잡힌 손목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에드먼드의 말대로 이건 무모한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홀로 무너져 내릴 때,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을 때의 고독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절실하게 도움을 바랐지만, 끝내 들려오지 않는 대답들에 대한 원망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그래도 갔다 올게요.”

웬디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왜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자네가 위험을 부담하나?”

“저 비명 소리가 과거에 힘들어하던 제 모습과 닮아서요. 제가 힘들 때는 에드먼드 씨가 저를 잡아줬지만, 저 밖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해요.”

웬디의 굳은 결심을 눈치챈 에드먼드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결국 에드먼드는 들고 있던 램프를 웬디의 손에 넘겼다.


“내가 안개를 막는 동안 최대한 빨리 갔다 오게. 대신 절대 무리하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으면 곧바로 돌아오게.”

“네. 약속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에드먼드는 직접 로비로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개는 금방이라도 본관으로 침범할 기세로 사납게 들이닥쳤다. 에드먼드가 강하게 팔을 내뻗자, 보이지 않는 장막이 안개의 침입을 막고 사방으로 흩어냈다. 그 사이, 앞치마를 벗고 거추장스러운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거둔 웬디가 램프를 높이 치켜들고 안갯속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웬디는 곧바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안개는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램프의 빛에 의지해 달려도 코앞까지 비출 뿐이었다. 마치 거대하고도 축축한 짐승의 입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분명 앞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발밑의 감촉이 진흙으로 바뀌고 옆을 스치는 나뭇가지들이 웬디의 옷자락을 홱 낚아챘다.


“여기가 어디지?”

순식간에 방향 감각을 잃은 웬디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동시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불쾌한 기억들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몰라서 방황하던 순간, 그녀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그냥 돌아가. 어차피 네 일도 아니잖아. 여기서 더 나아가면 너도 위험해질 거야.’

안개는 불쾌한 기억을 비집고 들어와 웬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나 그 순간 들린 미세한 신음 소리가 웬디의 정신을 일깨웠다. 웬디는 아예 눈을 감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만 집중하여 달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그녀는 안개를 헤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중심에서 작은 실루엣이 드러났다. 은색 허리띠와 청색 시계태엽 문양이 새겨진 제복 차림의 소년이었다.


“얘야, 내 말 들리니?”

웬디는 재빨리 말을 걸었지만, 소년은 자리에 박제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속눈썹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정신 차려봐!”

웬디는 서둘러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살이라기보다 딱딱한 목석에 가까웠다. 웬디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램프 속에 있던 황금색 가루가 자신을 내보내달라는 듯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웬디는 곧바로 램프의 빗장을 풀고 유리벽을 열었다. 램프를 빠져나온 황금색 가루는 넓게 퍼져 소년을 감싸 안았다. 직후, 소년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지며 온몸에 혈색이 돌았다. 파르르 떨리던 소년의 입술에서 아주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너무 추워요.”

“조금만 참아. 금방 도착할 거야.”

웬디는 아이를 반쯤 안다시피 하여 서둘러 산장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은 훨씬 짧게 느껴졌다. 어쩌면 숲이 웬디에게 길을 알려준 것일지도 몰랐다. 본관에 도착하자 에드먼드가 급히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현관문이 쿵 닫히고 나서야 웬디는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괜찮나, 웬디?”

“헉, 헉,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저 얘를...”

웬디는 자신보다 소년의 상태를 먼저 살피게 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소년은 급한 대로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게 해 열기를 쐬게 했다.


“세상에, 이 어린것이 독한 안갯속에서 얼마나 헤맨 거니?”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나온 마가렛은 소년을 보자마자 탄식을 했다.


“밍크! 창고에 가서 제일 두툼한 담요 좀 가져와!”

마가렛의 호령에, 밍크는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순순히 몸을 일으켜 담요를 물어왔다. 그 사이 주방에 갔다 온 마가렛은 퀴리 열매를 듬뿍 넣은 따뜻한 우유를 내왔다. 어깨에 두꺼운 양모 담요를 두르고 시나몬 향기가 가득한 우유 잔을 손에 쥐자, 소년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안개가, 안개가...”

소년은 연신 불안한 듯 같은 말만 내뱉었다. 웬디는 소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여기는 안개가 들어올 수 없어. 불안하면 우유를 한 모금 마셔볼래?”

웬디의 다정한 목소리에 소년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그는 아주 먼 곳에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웬디를 바라보았다. 안개의 영향 때문인지 갈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뿌연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웬디의 온기 어린 시선이 닿자, 그 기운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소년은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한 우유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터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세상이 너무 조용해져서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그런데 정작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소년의 말은 횡설수설했고 내용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웬디는 소년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괜찮아. 어디를 가야 하는지 모르면 잠깐 쉬었다 가도 돼.”

그 말은 어쩌면 도시에서 힘들어하던 시기에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불안해 보이는 소년을 향해 웬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제야 안심한 듯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에드먼드는 창고에서 가져온 두툼한 이불을 응접실 한쪽에 가지런히 두고, 잠든 소년을 살며시 안았다. 피로가 쌓인 탓인지 소파로 옮기는 와중에도 소년은 깨지 않았다. 밍크는 심드렁하게 하품하며 소년의 발치를 덮은 이불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응접실 전등을 끄고 나온 두 사람은 발소리를 줄이고 프런트로 걸어갔다. 에드먼드는 램프 속 황금색 가루가 사라진 것을 보며 물끄러미 생각에 잠긴 듯했다. 웬디는 그런 에드먼드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에드먼드 씨, 저 아이가 입고 있는 옷. 제프 씨의 마차에서 본 시계태엽 문양과 같았어요. 혹시 저 아이가 제프 씨와 관련이 있는 걸까요?”

“눈썰미가 상당히 좋군.”

에드먼드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 아이가 입은 옷은 마법학교 교복일세. 크로노스라는 마법학교의 상징이 바로 시계태엽 문양이지.”

“그러면 제프 씨도 마법학교 출신이라는 건가요?”

웬디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프 녀석이 경박해 보여서 그렇지, 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마법사 중 한 명이라네.”

“제프 씨가 상인이 아니라, 마법사였다니.”

웬디의 조용한 중얼거림에 에드먼드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산장을 운영하는 마법사도 있는데 이상할 건 없지.”

“그것도 그렇네요.”

“크로노스의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한다네. 1초를 1분처럼 쓰게 만들고 모든 걸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통제하지. 저 소년은 아마 가혹한 교육 방식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온 학생일 걸세.”

“제프 씨는 저 아이가 오늘 밤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램프를 준 거고요?”

“글쎄.”

에드먼드는 목 부근을 긁적이며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 속내를 누가 알겠나. 제프는 돈이 되는 정보라면 영혼이라도 팔아치울 녀석이지만, 어떨 때는 자선 사업가처럼 가진 재산을 풀기도 하거든. 그가 정말 후배들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는지는 모르겠군.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지.”

에드먼드는 오른손 검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한다는 거지.”

이쯤 되니 웬디는 제프의 능글맞은 미소 뒤에는 무슨 생각이 가득할까 궁금했다.


“저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하죠?”

“일단 오늘은 푹 재우고 내일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돌아가길 원한다면 학교에 연락을 취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면 별채 하나를 빌려주고 손님으로 대접해야지.”

에드먼드는 복잡한 일은 내일로 미루자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서류들을 붙잡고 넘겼다. 웬디는 죽은 것처럼 잠든 소년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극심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늦게까지 잠을 뒤척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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