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rogram), Pre-school, A(Academy)
노랗고 긴 버스가 들어온다. 몸으로 놀면서 배워야 할 시기의 아이들을 책상에 앉혀놓고 영어 공부를 시키는 영어유치원 버스다. 어미새가 어린 새의 양쪽 날개를 잡고 벌렸다가 오므리며를 반복하며 날갯짓 연습을 시키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노란색에는 내 아이를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모의 부담이 묻어있는 것 같아 어쩐지 안쓰럽다.
영어학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부모들의 무엇을 자극하는 것일까? 기꺼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도록 만드는 그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부모들은 수업료가 비싸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호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나 보낼 수 없으므로.
먼저 '영어 유치원'이라는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영어유치원은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이다. 실제로 '영어 유치원'이라고 간판을 내걸면 교육법에 걸린다. 불법이다. '00 영어학원 유치부' 또는 '00 어학원 유치부'라고 불러야 옳다. 대부분의 학원이 P(Program), A(Academy), Pre-school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이유다.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영어학원 유치부에 다녀요.'가 아니라, '영어유치원에 다녀요.'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은근히 표현을 바꾼 데에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유아를 영어학원에 보내는 것은 스스로도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학원'이 아니라 '영어도 배우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며 심리적 평형을 찾는 것이다. 나는 춘이를 영어학원 유치부에 보내고 싶지 않다. 이유는?
1. 영어학원 유치부는 관습적 학습 방법을 사용한다.
관습적 학습 지도는 '유아기 발달 특성'과 맞지 않는다. 비효과적이다. 효과가 미미하다. 관습적 학습이란 성인이 교육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된 읽기 및 쓰기 행동이 중심이 된다. 영어유치원 수업 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 단어 외우기, 책상에 바르게 앉아 영어교재 보기, 네모 칸에 반듯하게 따라 쓰기 등의 방법으로 가르친다. 초등학생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유아에게 지도를 하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숱한 연구로 증명되었다. 굳이 비효율과 비생산성이 입증된 방법으로 교육하고 싶지 않다.
부작용의 우려도 있다. 학부모의 기대와 달리 아이는 영어에 대한 거부감, 부정적 자아상, 학습된 무기력감을 느낄 수 있다. 유아는 받아쓰기와 같은 시험의 형태에 압박을 느끼고, 반복적 글자 쓰기 연습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학령기가 되었을 때 관습적 학습 방법을 잘 받아들여 학습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유아기에 풍부한 발현적 학습을 경험해야 하는데 영어학원 유치부는 거꾸로 접근하고 있다고 느낀다.
2. 모국어 발달이 견인할 인지 발달을 놓친다.
학습에는 모국어 발달이 가장 중요하다. 모국어의 발달은 곧 사고의 발달이기 때문이다. 모국어 확립 이전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모국어(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발달이 견인할 인지 발달을 놓친다. 많은 부모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을 내면서 정작 모국어를 놓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의아하다. 교육자뿐만 아니라 뇌과학, 소아정신과 의사 선생님들도 영어유치원의 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해 부정적인 우려를 표하고 있음에도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을 뒤로하고 영어유치원에 열을 올리는 일부 풍경을 보면 가끔 고개가 갸우뚱한다.
국어는 '도구 언어'다. 세계 모든 나라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 편제에 모국어 교육이 가장 많은 시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모국어를 풍성하고 다양하게 경험하고 확립해야 하는 시기에 영어를(그것도 관습적 학습 훈련으로)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무지 또는 욕심 또는 결핍이 크다고 생각한다.
3. 입시를 생각하면 영어유치원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결국은 수능시험에서 길고 짧은지 대보는 것 아닌가? 해외 유학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 입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영어유치원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느낀다. 영어유치원에서 쏘아 올린 공이 고3까지 이어져 수능시험의 결과 2등급 또는 3등급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가끔 교보문고에 가서 중고등학교 영어문제집을 들춰본다. 텝스나 토플 수준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성실함으로 이를 수 있는 수준의 영어다. 4,5살부터 비장하게 배워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4. 문해력이 골자다.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을 보여주고 싶다. 단어를, 문장을, 문단을, 글 전체를 이해하지 못해 교과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험 문제를 못 푸는 식이다. 중고등학교 내신ㆍ수능 시험 문제를 보자. 압도적으로 '읽기 영역'이 많다. 거칠게 말하자면 영어든, 국어든, 사회든, 과학이든 모든 교과 시험은 결국 '읽고 풀기'다. 읽어야 푼다. 교과학습에 관여하는 읽기는 부호화(Encoding)된 글자 기호를 소리값과 연결시켜 음성으로 변환(Decoding)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문해력이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문해력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 먼저다. 일반 외국인처럼 영어회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지식인처럼 영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모두가 언어영역 100점은 아니며, 모두가 안내문이나 공문서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교육받은 미국인의 영어라면 문해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영어로 토론을 하고,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영어로 공식적 말하기 잘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모국어가 견인하는 사고력, 그리고 문해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어학원 유치부를 고려하게 된다면 다음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첫 번째, 남편이 미국인이어서 내 딸이 자연스럽게 다중언어사용자(bilingual)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경우이다.
두 번째, 내 딸이 언어에 특출하고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만 4세가 되었을 때 초등학령기 수준의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가 가능한 경우이다.
세 번째, 우리나라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닐 계획이 없는 경우이다.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면 영어학원 유치부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는 미국의 언어가 아니다. 세계어(International language)이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나도 매일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아동의 발달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도되는 모든 교육은 위험하다. 우리 부모의 마음 안에 어떤 불안이, 열등감이, 욕심이, 경쟁심이 들어있나 살펴볼 일이다. 공포와 불안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기보다 부모가 느끼는 불안을 아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의 불안은 어른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아이들만큼은 행복하게 자라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