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참외들


2021년 7월 25일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여름날에


5월이 되어 새벽바람도 따스해질 무렵 참외와 가지를 텃밭 상자에 심었다. 텃밭이 따로 있으니 꽃화분을 만들자는 광민을 설득해서 데크 옆에 꽃화분보다 몇 배 더 큰 텃밭 상자를 만들게 되었다. 문만 열면 맛있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장면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제법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심고 싶었으나 또 광민이 말린다. 열매를 제대로 열리게 하려면 욕심은 금물. 이번 해는 처음이니 조금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꽃이 예쁜 가지를 한쪽 끝에 심고. 반대편 끄트머리에 먹다 남은 파뿌리 몇 개, 나머지 넓은 자리는 예쁘고 향기 좋고 맛 좋은 노란 참외가 모두 차지하도록 했다.


6월이 되자 참외 순이 아주 많이 번성하기 시작하고 꽃도 탐스럽게 피어났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텃밭의 참외밭도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바로 옆 수박밭엔 탐스런 수박들이 심심찮게 새로운 녀석이 나타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 무성한 참외 순을 매일 뒤져도 열매들이 드물었다. 그러다 6월이 지나갈 무렵 텃밭상자에 겨우 참외가 한 개 열렸다. 다시 희망을 품고 아침마다 물을 주며 참외 열매를 기다렸지만 참외가 노랗게 익어 가도록 다른 녀석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가끔씩 맺혔던 손톱만 한 열매도 곧 사그라들고 만다. 그 와중에도 노란 참외 꽃은 점점 더 크고 예쁘게 피어 텃밭 상자는 참외 밭이 아니라 참외 꽃밭이 되어 버렸다.


가지는 미처 다 먹지 못해 말려 가면서 먹고 있는데 몇 배나 자리를 크게 차지한 참외는 고작 열매 한 개로 끝내겠다는 것인가?



어느덧 여름 한 복판이 되고 장마가 시작되자 참외 순은 더 많이 번성하고 물 주기에 신경 쓰지 않는 틈에 제법 큰 참외 하나가 더 생겼다. 새 열매가 반갑긴 했지만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는 없어 보였다. 세찬 장맛비에 텃밭상자 안에 할머니 할아버지 순들은 이미 낙엽이 되었고 엄마 아빠 순들도 시들시들해졌다. 그나마 참외 꽃밭도 끝나려는 모양이다. 텃밭엔 그래도 몇 개씩 새 열매들이 맺히는데 텃밭 상자는 열매를 만들만한 양분이 충분치 않은 탓인가? 이렇게 커다란 상자에서 열매가 고작 두 개라니 역시 텃밭 상자로 무릉도원을 만들겠다는 건 과한 욕심이었나? 어찌 되었건 내년엔 텃밭 상자에 참외를 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워가던 어느 날 텃밭 상자 밖 데크 위에 제법 굵은 참외 두 개가 버젓이 앉아있다. 너무 기쁘고 신기해서 데크 위로 올라온 순들을 위해 광민의 손을 빌지 않고 직접 대나무로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순들은 가지와 파 줄기까지 감으면서 텃밭 상자의 가장자리까지 모두 점령했고 상자 밖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제 상자 안보다 밖으로 나온 순들이 더 무성하다. 며칠이 다시 지나고 혹시나 해서 상자 밖으로 나온 순들을 들춰보니 참외들이 주렁주렁 한꺼번에 일곱 개나 달려있다. 이럴 수가!


열매들이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짚을 깔아주었다.


데크 위로, 파쇄석 위로 하루가 다르게 많아지고, 커지는 참외들을 보면 너무 기특하고 세상 기쁘다. 뜨거운 여름 햇살조차 고맙고 감사하다. 텃밭에도 수박 밭까지 침범해서 참외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다. 옥수숫대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맺을지도 모르겠다.


참외는 손자 순부터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꽃이 피면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몇 세대를 거치도록 꽃을 피워내야 열매를 맺는 것이 참 신기하고 경이롭다. 그리고 진짜 때가 되면 뜨거운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여름 비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열매를 주렁주렁 만들어낸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같은 순이나 같은 순이 아니며 같은 꽃이나 같은 꽃이 아니다.


텃밭상자 밖 여기저기 땅도 아닌 곳에서 제멋대로 주렁주렁 열리는 집 나간 참외들을 위해 황량해 보이는 텃밭 상자에 물을 넉넉히 주어야겠다.


올해 저 텃밭상자에서는 참외가 몇 개나 열릴까?


내년에는 광민을 설득해서 꽃화분의 꽃들은 모두 땅에 옮겨 심고 토마토며 딸기, 블루베리 같은 열매들을 잔뜩 심어야겠다. 문 열고 나오면 맛있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오늘까지 텃밭 상자에 열린 참외는 모두 열아홉 개다.


9월이 되어 다시 첨가하는 글

9월 초까지 마지막 참외를 따먹었다. 지난번 글을 올린 이후에 텃밭 상자에도 몇 개 더 열렸고 이번 여름 텃밭까지 포함해서 100개는 따먹은 것 같다. 너무 달고 향기도 좋은 데다 모양까지 예뻤다. 옆집 친구네 참외는 훨씬 큰데 싱거웠다. 그래서 추측컨데 참외는 너무 거름이 많으면 싱거울 수도 있다는 것. (광민은 옆집 참외가 잡초 때문에 햇빛을 덜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참외를 한참 거둘 땐 잡초를 잘 뽑았었다. 하긴 거름이 좋으니 잡초도 더 무성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거름이 적으면 참외가 살아남기 위해 더 깊은 땅속의 양분을 빨아올리게 되고 거기에 진짜 맛있는 성분이 들어 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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